유정을 처음 만난 날,
나는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노란 꽃잎이 손끝에서 바스락거렸다.
햇살에 비친 꽃잎은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고,
은은한 향이 공기 전체를 물들였다.
하지만 그날따라,
꽃보다 내 손이 더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들었다 놓다,
결국 꽃을 가슴팍에 안은 채 그녀를 마주했다.
꽃을 건네자, 유정은 잠시 놀란 얼굴로 웃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마워.”
그 표정이 그렇게 좋았다.
나는 그날 이후,
그 표정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자주, 자꾸 꽃을 건넸다.
프리지아, 자나장미, 수국.
유정이 좋아하는 꽃들을 외워두고,
날씨와 옷차림에 따라 조화를 고민했다.
꽃을 고르는 순간이 하루 중 가장 설레는 시간이 되었다.
꽃집을 연 것도 결국 유정 때문이었다.
내 손으로 만든 꽃을 그녀에게 건넬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한참을 기쁘게 살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모든 게 좋았다.
⸻
어느 날, 유난히 까다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요구는 많고 말투는 무례했으며,
결국 아무 말 없이 가게를 나갔다.
하루의 기운이 쭉 빠졌다.
꽃이 아니라, 사람이 지치는 날이었다.
저녁에 유정을 만났을 때, 나는 무심히 그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좀 짜증 나는 손님이 있었어.”
위로나 공감을 기대했지만,
유정은 어딘가 망설이듯 말했다.
“근데… 손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잖아.”
나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에서는 무언가가 작게 툭, 부서졌다.
말 한마디 건네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돌아선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내 안의 말들은 줄어들고
눈치만 자라났다.
⸻
유정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그녀는 말했다.
“올해는… 분홍색 꽃다발 받고 싶어.”
나는 그 말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더 특별한 걸 해주고 싶었다.
평소보다 더 화려하고 새로운 조합.
내 마음의 총합을 담아,
수십 번 포장을 뜯었다 붙였다.
그건 말하자면, 내 식대로 만든
가장 예쁜 마음이었다.
꽃을 건네자,
유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선이 꽃 위를 천천히 훑다,
내 얼굴로 돌아오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평소 같으면 “고마워”라며 웃었겠지만,
그날은 침묵이 먼저 자리를 채웠다.
나는 그 고요가 불안하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유정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피했다.
숨을 몰아쉬다 끝내 눈을 감았다.
눈가가 번들거리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는,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
“나… 받고 싶은 거 말했잖아.
올해는 분홍색 꽃이라고.
근데 왜 또 언니 마음대로 해?”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유정의 울음보다,
내가 다 쏟아부었다는 마음만
더 크게 맴돌았다.
⸻
며칠 뒤, 나는 친구에게 그날 일을 털어놓았다.
“내 마음 다 쏟아부은 건데, 유정은 왜 그렇게 울었을까?”
친구는 잠시 듣더니 조용히 말했다.
“넌 늘 정성을 다하지만…
그게 꼭 상대를 위한 건 아닐 수도 있어.
네가 크게 주고 싶었던 만큼,
유정은 그냥 작은 걸 원했을 수도 있잖아.”
나는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 나는…’ 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반발했다.
그만큼 사랑한 건데,
왜 그게 자꾸 엇나가기만 하는지.
⸻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동네 꽃집 꽃다발을 들고 유정을 찾았다.
리본은 짧고, 색 배합이 조금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내가 했으면 좀 더 예뻤을 텐데.”
나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유정은 꽃을 들고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거리,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
멀리서 들리는 아이의 울음과 사람들의 웃음.
그 모든 풍경이
우리 사이만 비껴갔다.
그녀는 꽃을 잠시 바라보다,
작은 한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
유정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언니는…
꽃 줄 때마다,
항상 꽃부터 봤어.”
목소리는 낮았고,
눈은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 꽃이 예쁜지,
내가 예쁘게 받는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더 중요해 보일 때가 있었어.”
조용한 말들 사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정은 잠시 숨을 고르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언니한테 꽃 받는 게,
행복하지 않아.
그냥,
부담스러워.”
나는 그 말을
머리보다 마음으로 먼저 알아버렸다.
그제야,
내가 건넨 꽃들보다
더 무거웠던 내 ‘기대’가 떠올랐다.
기뻐해줘.
예쁘다고 해줘.
좋아해 줘.
그런 마음을 숨긴 적이,
있었던가.
⸻
나는 끝까지
꽃을 보고 있었고,
유정은 더 이상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서로 다른 꽃을
보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