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냥 심심해서였다.
예쁜 여자였고,
나를 힐끔거리는 눈빛이
꽤 오래 머무는 게 보였고,
딱 한마디 던지면
어디까지 흔들릴지 궁금했다.
그녀는
자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어딘가 좀 웃겨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 같은 여자는 어때?”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 반응이,
딱 내가 노린 거였다.
그날 우린
처음 술을 마셨다.
나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내가 너 좋아하면,
넌 어떻게 할 건데.”
장난처럼, 농담처럼, 무심하게.
그러나 그녀는
바로 웃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고,
나를 천천히 바라봤다.
눈이 닿은 채
숨이 길어졌고,
나는 괜히 물을 들이켰다.
그녀가 낮게 말했다.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해?”
나는 웃는 얼굴로 받아쳤다.
“왜, 진심처럼 들렸어?”
그녀는 대답 대신
내 턱을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천천히, 깊게,
도망갈 틈 없이.
그날 이후,
우리는 몇 번이고 서로를 탐했다.
처음은 키스였다.
그다음은
옷깃, 목선, 허리, 숨결,
그리고 밤.
관계는 계속됐고,
나는 점점 그녀를 기다리게 됐다.
시작은 내가 했는데,
휘청이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
아무 날도 아닌 날,
그녀는 연락을 끊었다.
나는 며칠을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
결국 참다못해 전화를 걸었다.
“지금 나랑,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짧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리고 덧붙였다.
“그냥…
나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거였어.”
그 말이 참 차분했다.
마치
내가 하룻밤 불장난쯤 되는 것처럼.
누군가의 욕망 속에서
한순간 번지고
아무렇지 않게 꺼져도 되는 것처럼.
마치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모든 온기와 눈빛이
그저 착각이었다는 듯이.
솔직히,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슬쩍 건드리고
웃으며 빠져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빠져나오지 못했다.
선을 넘어온 건 그녀였지만,
남겨진 건
끝내 나였다.
그녀에게 나는 뭐였을까.
새로 산 립스틱처럼
한 번쯤 써보고 버려도 되는 것.
질리지 않는 선까지만 놀다
미련 없이 치워버리는 것.
그게 전부였다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면,
왜 나는
여전히 남겨진 기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