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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라 Jul 24. 2023

동서처럼 살고 싶었다

이렇게 등신같이 말고


올해 초 이후로 나는 대단한 현타에 빠져있다. 이걸 현타라고 해야 할지 자괴감이라고 해야 할지.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동서는 약 2년 전부터 명절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혼 직후부터 매번 시댁에 올 때마다 부부끼리 싸우고 밥상 앞에서도 냉랭한 기운을 펼쳤었던 데다가 시어머니께 전화해 이혼할 거라고 선언한 뒤였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원래도 친정이 늘 먼저였던 사람이다.


나와 동갑인 도련님은 한 살 연상 누나와 결혼했다. 손윗동서고 뭐고 나는 그저 언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어머니께선 그런 호칭을 반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친근한 호칭으로 정을 붙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이번 연도 설에도 동서는 동생과 해외여행을 가면서 역시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머님께선 내심 섭섭하셨던 모양이다. 그 모양을 본 아버님께서 시어머니께서 속상해하시니 연락해서 풀어라 라고 문자를 보내셨다.


그 카톡을 보고 동서가 정말 연락을 했다. 결혼 초부터 어머니께 속상했던 부분을 조목조목 모조리 써서 아주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시아버님께서는 분명 어머님의 기분을 풀어드려라라는 취지로 말씀하셨을 텐데, 정말 자기 마음에 있는 앙금만 풀려고 어머니한테 어퍼컷을 날렸다.


동서의 연락을 확인하신 저녁 어머니는 3일 내내 내게 울며 전화를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왜 그걸 듣고 있어야 했나 싶기도 한데 그땐 단지 어머니께서 속상해하시니 풀어드리려는 마음에 다 들어드리고 위로해 드렸다. 근데 동서는 큰 실수를 했다. 형님네는 편하게 산다는 둥 우리 부부를 언급하며 건드린 것이다. 자기네는 겨우 3천만 원 밖에 모으지 못했고 궁상맞게 사는데 어머님댁이 가게를 하며 받았던 대출을 어떻게 하실 거냐가 골자였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돈 얘기였다.


어머니한테 차별을 받아??? 내가??? 우리가 편하게 살아???


20대에 멋모르고 어머님 빚보증을 서서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 내 카드로 파산하고 면책시켜 준 사람이다. 파산비용은 총 110만원으로 10개월 할부였고 남편이 돈을 벌어왔지만 나도 일을 했다.


가게가 망해서 온 집안이 절망에 있길래 결혼도 하지 않았을 때 내 명의로 사업자를 내주면서도 좋은 소리 한번 못 들었던 사람이다. 가게 하며 돈이 필요할 때마다 나서서 멍청이같이 여기저기서 돈을 구해왔던 사람이고 어머님 아버님 이사 가실 때마다 국가지원금에서 대출까지 뛰어다니며 해결했던 사람이다.


물론 필요해서 쓰신 건 시댁이었기에 시댁에서 갚으셨다. 때때로 힘들 때 연체 연락이 오면 자존심 상해하셨고 가게를 정리하고 내 이름 앞으로 남은 빚과 살면서 우리가 얻은 생계 빚은 현재 개인회생 과정 중에 있다. 시댁에서 갚아주셨지만 내 명의로 얻은 빚이었기에 각종 연락과 서류처리 혹은 시댁에 전달해야 할 때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남편과도 갈등이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 그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동서에게 나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도 이런 과거에 대해 제대로 언급한 적도 없었다. 명절에 웃으며 밥이나 한 끼 먹으며 사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근데 명절마다 어머님 앞에서 나를 비꼬고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반기를 들고 도련님 바보로 만들고 시댁을 바보로 만들었던 여자가. 어차피 이혼한다고 말했고 좀 있으면 모든 것을 끝내서 남남이 될 수도 있는 여자가 돈이 없다고 시어머니에게 조차 깔아뭉갰다.


어머니께서도 속상해서 나에게 털어놓으신 거겠지만, 어머니마저도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시면 이런 말을 내게 하나 싶었다. 내가 동서에게 말 한마디 못 할 줄 아셨나 싶어서 말이다. 정말 어이가 없는 건 어머님께서 3일 밤낮으로 우시면서 3시간 간격으로 나와 남편에게 돌아가면서 전화를 하시는 동안 그 부부는 사이좋게 화해를 했고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동서에게 연락을 했다. 동서네는 시어머니가 사시던 집에 그대로 신혼집을 차리고 어머님 아버님께서 따로 나와 사셨는데 이전에 사시던 집의 계약금도 시부모님의 이사하신 집의 계약금도 내가 마련한 돈이었다. 동서네가 이사하면서 우리에게 당연히 줄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께서 그냥 동서네에 그 돈을 줄 수 없냐고 하셨다. 남편도 그냥 주라고 말을 했다. 당시 그 돈은 4 금융권이어서 최고금리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 집을 빼면서 돈을 갚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이자와 원금을 갚았지만 진전이 없었고 남편 벌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도련님에게 결국 직접 말을 했다. 동서를 통해 돈이 들어왔고 나는 그 돈을 갚았다.


그런데 동서는 그 돈을 나에게 당연히 돌려줄 보증금이 아니라 당신이 내가 빌린 사채를 갚아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어떤 사정도 몰랐던 것이다.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한 번도 안 하기도 했지만 이 사정을 이 집안에서 아무도 설명을 안 해주었고 내가 한 고생에 대해 아무런 감각도 없다는 게 마음에 사무쳤다.


가라앉았던 공황장애가 도졌고 화병이랄지 중간중간 조절할 수 없이 손이 떨리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이 가족에게 도대체 뭘 한 걸까. 왜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산 걸까. 동서는 나같이 고생하지 않아도, 매번 도련님과 싸우며 시어머니께 도련님 욕을 하고 명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콧방귀 뀌며 나를 우습게 보아도 아무도 눈을 흘기거나 말하지 않는데. 오히려 다독여주는데. 나는 온갖 개짓거리를 다해도 입덧하면 유세를 떤다 하고 나보다 남편과 아이가 우선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하고 있다.


정이 들었다고도 생각했다. 존경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순간도 있었다. 근데 동서의 말과 동서의 말에 반응하는 시댁, 그리고 남편의 반응을 보면서 무력감이 느껴졌다.


동네의 모든 지인들도 오히려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러게 시댁에 왜 그렇게까지 했냐며 이용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 남편과 그 가족은 지금의 모습으로 평범하게 살 수 없었을 거다. 그들은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나를 이렇게 썩어 문드러지도록 고생시키며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남편은 여전히 내가 한두 번 한 실수를 들먹거리고 마음에 꽁해있다. 내가 불편해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그걸 5년이고 10년이고 담아놓는다. 나는 그가 나에게 주었던 큰 상처들을 묻어놓았다가 그의 이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면 다시 마음이 앓아눕는다.


그래 맞다. 나는 바보다. 차라리 동서처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면 좋았을걸.


두 번 이혼한 엄마. 당시 교도소에 있다가 비명횡사한 아빠. 식장 들어갈 때 내 손을 잡아주었지만 주폭으로 이혼하고 아직도 방랑 생활을 하고 있는 새아빠. 내 가족이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


동서는 목사의 딸로 오랜 세월 살아왔기 때문에, 시어머니에게 그 어떤 부당함을 말해도 괜찮았던 걸까?


실제로 내 명의로 사업자를 내자며 다그치셔서 사업자를 내고 난 후 시어머니는 나에겐 그렇게 큰 소리를 치시고 우리 가족이 다 찾아오자 혜린이에게 이렇게 가족이 있는지 몰랐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고아취급 당했다. 실제로 내 마음이 의지할 곳이 없어 고아 같기도 했다.


그런데 동서의 엄마인 사돈이자 사모인분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올 때마다 오히려 한 번 더 숙이고 들어가셨다. 내가 시누이였다면 정말 가만히 안 뒀을 것이다. 하지만 시어머니기에, 그리고 그녀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기뻐서 했기에 말없이 지나갔다.


만약 친아빠가 늘 강조하듯이 너는 엄마아빠가 이혼한 적이 없고 너희 아빠는 큰 건설회사의 사장이고 엄마는 부동산 재벌이다라고 거짓말 하며 결혼했다면 나도 시어머니에게 똑같이 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나는 결국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일단 멍청해서 거짓말을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다. 이건 정말이다. 스트레스를 받아 온몸의 피부가 뒤집어진다. 게다가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자책감을 심하게 느낀다. 내 인생의 가장 큰 가치다.




한 달을 참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퇴근길 대뜸 엄마에게 전화 걸어 물었다.      


엄마, 도대체 나를 왜 이렇게 착한 딸로 키웠어?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의 쩝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을 마시다 컥컥 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에게는 대뜸 이었겠지만, 나에겐 평생의 질문이었다.


속사포같이 그간의 속상한 일을 쏟아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짜 우리 엄마가 맞는 건지, 쓸데없이 너무 객관적이다.      


아니 들어보니까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고 있으면서 네가 뭐가 착해?
 할 거면 진심으로 해!   

   

아... 이런 엄마 밑에서 커서 내가 이렇게 살았나 보다.


차라리 같이 욕을 좀 해줄 것이지. 근데 덕분에 정신은 들었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겪고 처음으로 동서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심이었다.


나는 정말 못돼 먹은 사람이고 그릇이 작은 사람인데, 그동안 해온 모든 일이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으로 한 것이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바꾸시는 과정이구나.


그래서 기도했다. 하나님 맞아요 저 못 돼먹어서 지금 감당 못 하겠으니 하나님이 좀 도와주세요. 기도를 좀 들으셨던 걸까? 아버님의 마지막 검사결과를 듣고 방법이 없으니 요양병원으로 이관시켜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오늘. 나는 정말 진심으로 아버님을 사랑했고 어머님을 사랑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미운 정이다. 어쩌겠는가 밉던 곱던 누구에게 정을 쏟아부어야 하는 사람인 걸. 다행인 건 그들이 나에게 해준 고맙다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그걸로 조금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동서가 생긴 후로 처음으로 진심으로 동서에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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