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경X인영구]인영으로부터
오빠, 답장이 많이 늦었다. 내가 한창 공모 중이라 시간이 안 나서 이제야 답장을 보내. 지금은 새벽 2시고, 내일 10시에 공모 마감이 있어서 나는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는 중이야. 그때쯤이면 시간이 나겠지, 했는데 정말 오늘 답장을 쓰게 될 줄은 몰랐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시간이 안 나서 대충 답장하는 메일은 보내고 싶지 않았거든 이해해주면 좋겠다!
며칠 전 팟캐스트에서 영화 소개를 해줬는데, 듣고 나서 오빠에게도 들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개인적으로도 좋아했던 영화인데 <컨택트>라는 영화야. 어느 날 지구에 우주선이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돼. 그전에 혹시 그런 얘기 들어봤어? 언어가 사고를 만든다는 얘기. 내가 국문과를 졸업했잖아. 언어와 문화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언어는 정말로 사고를 지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색깔을 나누는 수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 그 색깔을 모두 구분하는 것처럼 말이야. 왜 화장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 아래 같은 핑크는 없다는 말도 있잖아. 뭐, 그런 것처럼 말이야.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그 우주선에 탄 외계인의 목적이 언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순환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거든.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이 되는 원 형태의 언어. 우리가 잉크 발색할 때 뚜껑을 찍어서 색깔을 내잖아. 옆으로 약간 흐르기도 하고, 그런 모양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언어학자 루이스가 초정되지.
루이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외계인들과 접촉하게 돼. 먼저 다가가고, 그러면서 언어를 배우고, 온전히 이해하게 되니까 새로운 사고를 하게 돼. 그 언어의 형태처럼 삶을 바라본다고 해야 하나. 현재를 사는 동시에 미래를 알게 되는 거야. 오빠 말대로, 인생의 정답까진 아니더라도 길을 알게 되는 거지. 어땠을 것 같아? 시작과 동시에 끝을 알게 된다는 건 아무것도 모를 때보다 더 슬프기도 하더라고.
사실 스포를 안 하려니 너무 어렵지만, 결국 루이스는 낭떠러지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게 돼. 팟캐스트 끝 무렵 즈음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루이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우리가 죽을 걸 알면서도 이 삶을 지속하고 언젠가의 헤어짐을 알면서 누군가를 사랑하잖아. 인생이 그런 것 같아. 알고 있더라도, 모르더라도 꼭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는 것. 더 자세한 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사는 건 늘 어렵고, 나도 가끔씩은 마음이 허할 때가 있어.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결혼이나 내 집 마련 같은 단어를 보면 머리가 막 아파와. 나는 여전히 어린것 같은데 내 앞에 놓인 일들은 너무 무겁기만 한 것 같고. 그렇지만 정답이 있는 삶은 ... 잘 모르겠어. 답이 정해져 있다면 슬플 것 같네. 적어도 나는 그래.
매일매일이 무겁지만, 답이 없는 이 삶을 조금만 사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쳇바퀴 같은 이 삶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잖아. 언젠가 나도 결혼을 하게 되고, 언젠가는 쉬는 것보다도 더 재밌는 일들이 잔뜩 생기고 그런 기대들로 살아봐야지 뭐. 내일은 오늘보다 아주 조금, 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예를 들면, 아주 오래 기다렸던 편지의 답장이 도착한다든지?
오빠의 내일이, 오늘보다는 조금 더 재밌기를 바라며
그럼 안녕, 잘 지내고 또 메일 보내줘!
2020.03.24
인영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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