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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영구 Nov 10. 2021

#9. 만우절이니까

[댕경X인영구] 인영구로부터

오늘 새벽 네 시에 퇴근해서 오후 두 시에 다시 출근을 했거든. 새벽에 회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어! 오늘 만우절이에요! 하는 거야. 너무 오랜만에 듣는 단어여서 사실 조금 놀랐어. 예전에는 누구보다 그런 날들을 좋아했는데 사는 게 바빠서 점점 모르게 되는 게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렇게 피곤한 날 아침에 메일함에서 오빠 메일을 발견해서 너무 기뻤어. 메일을 열어보면서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설렜던 것 같아.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서 답장을 바로 보내.




사실 나는 사랑에 있어서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늘 적극적으로 표현했고, 그게 늘 만남으로 이어졌어. 그게 아니더라도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친구를 보며 좋아하는 마음과 호감 사이에 마음을 가지게 됐어.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아. 근데 어쩐지 그 친구한테는 표현을 못하겠는 거야. 그때 내가 진짜 용기가 없다는 걸 알았어. 여태껏 내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까 그보다는 영악했던 것 같아. 고백을 했다기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거였지.





그 누구한테도 얘기해본 적이 없었던, 그냥 나 혼자만 품고 있던 얘기라 좀 이상하다. 그 애랑 나는 원래도 아는 사이였는데, 어떤 기점으로 인해 친해지게 되고 꾸준히 만나게 됐거든. 참 바르고 단단하다고 생각했어. 근데 우리 사이에는 흔히 썸이라고 부를만한 시그널도 없었고, 그런 류의 이야기가 오간 적도 없어. 나한테 잘해주거나, 정말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는데도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됐어. 내 글을 참 좋아해 줬거든.  그 애가 내 글을 좋아해 주고, 아껴준다는 점이 참 좋더라고. 외모도, 성격도 아니고 그냥 그 부분이 너무 좋았던 것 같아.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 알아볼까 봐 걱정돼서 생략하려고. 다른 친구가 그랬어도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원래 호감이 있었는데 그때 알아차린 걸까?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




아마 그 친구는 나한테 마음이 전혀 없었을 거야. 내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거고. 나는 그냥 우리가 친구인 게 좋았고, 앞으로도 친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좋아한다고 말하면 더 좋아하게 될까 봐, 이게 사랑이 될까 봐, 결국 마음을 전하고 싶을까 봐 그러지 않았어.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지나가는 말로 오빠랑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선뜻 고백할 수가 없다, 친구로 지내면 오래 함께할 수 있지 않냐. 마음을 고백했다가 좋은 친구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그랬더니 그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어.




인영아,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친구도 영원하진 않잖아.





아직도 마음에 깊이 남는 이야기야. 물론 나는 마음을 전하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좋은 친구 사이로 남아있어. 글쎄 어땠을까. 내가 마음을 전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잘 모르겠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게 누군가와 나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단초가 된다는 게 조금 슬프기도 해. 만우절이라 마음을 전했던 오빠가 사실은 나보다 용기가 있던 걸지도 몰라. 나는 그럴 용기조차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로 보면 그만한 용기도 없었던 내가 다행인 걸까? 용기가 없어서 관계를 지속하게 됐다는 게 정말 좋은 걸까? 그냥 나도 생각나서 말해봤어. 좋아하는 마음이 슬퍼질 수 있다는 게 어쩐지 씁쓸하다. 




나도 그냥, 그냥. 

만우절이니까.





*

[아우어 레터는 매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INS.

댕경 @luvshine90                                    

인영구 @lovely___09                                  

지름길 @jireumgil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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