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호> 6

by 남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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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그는 직장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이곳 생활이 특별한 경력이 되지 못할 게 뻔했고, 다른 일을 시작하려면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인지도 몰랐다. 마음은 조급하고, 생활은 빤하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집을 옮겨야 할지도 모르겠어, 아내와 의논해 봤는데, 같은 말들을 할 때 그의 미래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어느 시간을 우리는 기약할 수 있을까.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꼭 그가 살던 고향에 가보자고, 이미 첫눈은 왔고 겨울은 깊어가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약속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약속이란 허무의 언 발을 녹이는 잠깐의 온기였을 뿐. 그가 전화하기로 한 시간에 전화가 오지 않거나 낯선 번호로 전화가 올 때면 혹시 나를 들킨 게 아닐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사무실에 30대 중반의 여자가 들어올 때, 올 사람이 없는데 오피스텔 초인종이 울릴 때는 온 몸에 피가 얼굴로 쏠리는 것 같았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거라고 다짐하면서.


기다림과 기대에 지치는 일은 생각보다 끔찍해서 어느 날은 그의 연락이 못 견디게 반갑고, 어느 날은 그 연락 때문에 애써 견뎌온 생활이 엉망이 되곤 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거나, 맥주를 사러 갈 때, 배달비를 아끼려 치킨을 찾으러 가는 길에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하거나 전화를 했다. 갑자기 걸려온 아내의 전화나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치킨 집 앞에서. 통화는 그의 시간에 맞춰 끝날 때가 많았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급히 통화를 마무리하거나 주고받던 문자가 뚝 끊어질 때면 나는 혼자 쓰레기통에 내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그에게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틈이 나면 연락하려 애쓰고 있었으니까. 주고받던 문자가 갑자기 끊어지거나 헤어지고 돌아가도 연락이 없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을 그의 풍경을 상상하곤 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들이 졸졸 그를 따라다닌다. 그의 아내가 다정히 그의 허리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도저히 문자를 할 수 없다. 그래도. 잠깐 화장실에 가서라도 잠깐. 그 잠깐이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걸까. 아니면 마음이, 그의 마음이. 그의 마음이라고 쓰면. 나는 더 이상 생각할 기운을 잃었다. 그의 마음이 거기까지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는 매일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의 생활을 낱낱이 알지 못해도, 바쁜 틈을 쪼개 목소리를 듣지 못해도 괜찮았다. 다만 그의 마음. 그가 나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을 문장으로 읽고 싶었다. 내 마음을 쓰면. 기쁘다가고 슬프고, 행복하다가도 슬프고, 보고 싶다 가도 슬프다고 내가 쓰면. 그는 자꾸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 도은아. 다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슬픈 생각 하지 마. 대체 뭐가 괜찮을 거란 말일까. 그의 아내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 우리가 계속 만나도 괜찮다는 걸까. 내 슬픔은 습관 같은 거라 그냥 지나쳐도 괜찮다는 걸까. 그의 생활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데 나의 생활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축복일까, 비극일까. 내가 본인 삶에 가장 큰 행복이라고, 영영 잃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그러니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고 하는 그의 말에는 빈틈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도 딱 그만큼이었으니까. 가장 수치스러운 건 내 태도였다. 모든 걸 버리라고 할 만큼 그를 사랑하진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임지지 않을 만큼 사랑하겠다는 마음. 차라리 같이 죽자고 그에게 매달렸다면 그는 나를 끔찍해했겠지만 나는 나를 지금보단 덜 끔찍해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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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의 순간이 끝나기 무섭게 허무는 칠흑 같은 낭떠러지로 나를 떠민다. 기다렸던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급하게 안을 때, 그의 몸을 껴안고 안도할 때, 아직 환희의 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 순서 잃은 허무가 덮쳐와 알몸으로 안긴 채 엉엉 울어버렸을 때, 그는 영문을 몰라 놀랐지만 나 역시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눌 수 없는 비밀을 혼자 쌓아가는 동안 마음에는 세상을 향해 없던 벽이 생기고 그늘이 진다. 나는 마음을 통째로 숨기는 사람이 된다. 깊고 깊은 우물 안으로. 아무리 고개를 처박고 내려다봐도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검은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곳에 비친 내 얼굴은 검어 지다 사라진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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