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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엔 출발해야 해.”
바다는 하늘빛을 따라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이제 곧 해가 질까.
“노을이 보고 싶어.”
해가 지는 모습을 온전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해가 지기 시작해서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뜨거운 불구덩이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작별의 시간을 내 눈으로 똑똑히, 마지막까지 보고 싶었다. 나는 그가 정해둔 시간에 맞춰 바다를 떠나고 싶지 않다.
“도은아, 이제 출발해야 해.”
그가 아이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출장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돌아가야 한다. 아이들과 저녁을 함께 먹어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일이다. 가족은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하고 그는 누군가의 가족이니까. 나는 누군가의 가족을 데려다 뻔뻔한 고집을 부린다.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일. 그의 생활을 침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덩이처럼 온 마음을 태운다. 한 번쯤은, 이 바다에서, 나도 한 번쯤은, 내 마음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싶다.
“노을이 보고 싶어.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끝까지 보고 싶어.”
“그래. 우리 또 시간 내서 오자. 그때는 해 다 지는 거 보고 집에 가자.”
“아니, 오늘. 나는 오늘 보고 싶어.”
“도은아, 왜 갑자기 안 그러던 고집을 부려.”
그래, 나는 한 번도 고집을 부린 적이 없었지. 그를 곤란하게도, 슬프게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먼저 가. 나는 버스 타고 갈게.”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얼굴이 가여워 당장 짓궂은 일을 그만 둬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맹렬한 욕망이 스스로도 낯설다.
“나는 오늘 노을을 볼 거야. 여기 이 바다에서. 내가 이것도 마음대로 못해? 가. 같이 있자는 거 아니잖아.”
“아니, 여기 낯선 데 널 두고 내가 어떻게 가.”
곤란한 얼굴의 그가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정말이지 그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싶지도 않다. 시험에 정답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정답이 아니란 걸 확인할 뿐일 테니까. 물론 내가 곤란해지고 싶지도 않다. 나도 너무 무섭고 두려웠으니까. 그와 나는 공범이고 나는 그에게 조력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노을이 보고 싶다. 단 한 번만,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 그가 정말 나를 두고 간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응, 노을 보고 가자. 집에 전화했어. 아내가 화가 좀 나긴 했지만 내가 가서 잘 이야기하면 괜찮을 거야.“
우리는 해 지는 바다 앞에 서 있다.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를 속이게 만드는 공범이 되어.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한 사람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하늘을 본다. 하늘은 점점 흐려지고 구름은 가득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노을은 보이지 않는다. 파도는 높아지고 그들은 점점 말을 잃어간다. 마침내 어두워지고 깜깜해지고, 해는 지지도 않고 사라졌다. 천천히 붉게 타오르다 아름다워지는 일 따위 없이. 해는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같이 먹고 싶던 음식점이 문을 닫거나 함께 들으려던 음반 CD가 아무리 찾아도 없을 때, 어렵게 정한 약속이 갑작스러운 일로 어긋날 때. 사소한 불운들을 나는 일종의 경고라고 생각했다. 신이 주는 마지막 경고. 이번만, 이번 한 번만, 신에게 빌면서. 결국 뻔한 결말을 위해 우리는 여기까지 온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