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호> 5

by 남몰래


*

거리는 더 깊은 겨울로 앙상해져가고 나는 두꺼운 겨울 이불을 꺼내고, 슬리퍼를 바꾸고, 따뜻한 물을 끓이며 그를 기다렸다. 그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내 슬픔을 고스란히 말할 수 있었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겠지. 내 마음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므로. 소설만이 나의 말을 받아주었으므로. 너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하고 창백한 얼굴이었으니까 나는 매일 밤 소설 쓰는 일에 매달렸다. 그토록 안아주고 싶었던 그의 슬픔이란 무엇이었을까. 골목 끝에 앉아 있던 그의 등을 나는 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함께 함박눈을 기다렸고, 사랑해, 보고 싶어, 안고 싶어 도은아. 그의 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의 마음은 처음 가을 숲에서 멀리, 어느 하늘을 떠도는 구름처럼 자꾸만 아득해졌다. 내가 말하고 그가 답할 때마다 그의 대답은 조금씩 내 기대를 무너뜨렸는데 그건 그와 내가 말하는 적당한 선이란 게 서로 달라서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서로의 생활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비밀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서로를 위한 것이었고 나 역시 생활을 유지하면서 적당하게 마음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금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우리는 완전한 남남이어야 했는데 첫눈이 오던 어느 날엔 첫눈이 온다고, 그 말을 그에게 하고 싶어 하루 종일 애가 탔다. 첫눈이 온다는 말은 다신 할 수 없을 텐데. 하루 종일 창밖에 눈을 보며 혼자 그 말을 했다. 첫눈이 와, 준호씨.


그가 그은 선은 단정했는데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을 자주 헷갈렸다. 두 직선의 어긋남. 그 차이 때문에 내가 혼자 우는 건 괜찮았지만 그가 나를 부담스러워 하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를 조르는 대신 내 마음이 그리는 선을 감추려 애썼다.


*

매일 밤 열쇠 꾸러미를 들고 자물쇠 앞에 앉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이 자물쇠 구멍에 맞는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찾기 전까지 잠들 수 없습니다.

“제 것인가요?”

“네. 당신 것이니 당신만이 찾으실 수 있어요.”

“안 찾으면 안 될까요? 그냥 모른척하면요?”

“점점 가라앉습니다.”

“가라앉으면 어떻게 되나요?”

“영영 잃어버리죠. 이름이 없는 건 영영 묻히고 말아요.”

“저는 잃고 싶지 않아요.”


활자를 벽에 대고 갈아 봅니다. 사랑과 기쁨, 이해와 오해, 그리움과 슬픔, 미움과 질투 같은 단어를 차례로 만들어 열쇠 구멍에 넣어 봅니다. 어느 것도 맞지 않아요. 어떤 활자로도 열 수 없습니다.


“저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죄를 지었군요.”

“마음이 점점 가라앉습니다. 영영 잃어버리는 건가요?”

“다 사라지고 나서. 아주 오랜 후에.”

“이름을 알게 될까요. 무엇이 남게 될까요.”

“알 수 없어요.”



새로 쓰는 소설은 어떤 여자가 매일 밤 수백 개의 열쇠 꾸러미를 들고 자물쇠 앞에 앉아 열쇠 구멍을 맞추는 이야기였다. 소설은 도대체 시작도 끝도 없었는데 거기엔 열쇠 꾸러미 앞에 서서 난처해하는 여자만이 등장했다. 그 여자가 곤란한 얼굴로 울고 웃고 그러다 다시 우는 이야기를 쓰고 또 썼다. 그에게 소설을 보여주진 않았다. 어느 때부터 그도 내가 쓰는 소설에 대해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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