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신 1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by 남몰래

안녕, 햇살: )


새벽에 이 편지를 확인하고 다시 오밤중이 오기를 기다리기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하면 빙긋 웃는 시간을 보냈답니다. 편지를 써 달라는 황당한 부탁에 이렇게 선뜻 응해주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저는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토독토독 메일을 쓸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편지를 받는 일은 이렇게 행복한 것이군요. 기분이 좋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6번의 연극 수업이라니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어요. 유치환의 '행복'을 읽고 장면을 구성했다니 놀랍고 신기해 얼른 시를 찾아보았어요. 저는 아무리 봐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가슴 아픈 사내의 일로만 읽히는데. 거기서 여러 인물을 만들어 내고 심지어 편지를 엇갈리게 해서 해피 엔딩으로 끌고 가다니! 제 상상력이 이토록 빈약한 것이었나 반성하게 되었어요. 편지는 제자리에 닿아야 하는 거지만 그렇게 어긋났을 때 새로운 기운을 뿜기도 하는 걸까 생각하니 편지는 쓰는 순간 저 혼자 날아가는 것이고, 누가 받을지는 보내는 사람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겠단 생각도 들었어요. 내 마음에서 이미 달려 나간 사랑처럼요. 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친구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까 조금 염려되기도 하셨군요. 그 표정을 보며 마음이 상하진 않았을까 고민할 당신의 모습이 그려져 조금 웃었습니다. 심각한 상황인데 말이죠. 아마 친구분은 금세 마음을 푸셨을 거예요.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일 게 분명하니까요.


사람들과 협업할 때 제가 꼭 떠올리는 장면이 있어요. 초등학교 5학년 학급 회의 시간이죠. 그때 저는 반장이었고, 학급 회의를 근사하게 이끌고 싶었어요. 주생활 목표를 정하고 실천 사항을 정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주생활 목표를 '물총 놀이를 하지 말자.'로 하자는 거예요. 저는 기가 막혔어요. 주생활 목표란 '질서를 잘 지키자.'처럼 좀 더 추상적인 것이고 물총 놀이를 하지 말자는 실천 사항이라 생각했던 거예요. 다수결로 결정되었는데도 계속 속이 상했죠.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꼈어요. 찬성한 아이들에게 이걸로 실천 사항을 어떻게 할 거냐고 다그쳤어요. 그러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실천 사항 발표로 넘어갔는데. 애들이 '물총을 가져오지 말자', '물총을 사지 말자.' 뭐 이런 실천 사항을 앞다투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생활 밀착형으로 회의가 잘 마무리가 됐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내 뜻만이 뜻이 아니다. 협업에서 욕심이 불쑥 올라올 땐 항상 그날을 생각합니다. 내 뜻만이 뜻이 아니지, 하고요. 하하하.


중고등학교 시절엔 왜 그리 많은 편지를 썼을까요? 그 글자에, 그 글자의 수신인에게 많은 시간을 의지했던 것 같아요. '정말 매일이야'하는 당신의 문장이 너무 좋아 밑줄을 그었습니다. '어제의 편지에 오늘 답장을 주니 서로 매일 주면서 받았어.' 사랑한다.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 주고받던 편지라니. 세상에! 그런 밀도 높은 사랑을 다시는 할 수 없겠죠? 그 시절에는 그런 만남과 감정이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 같아요. 단짝 친구라 말하는 동안 달콤한 솜사탕이 눅진하게 온 입안에 머뭅니다. 그이는 얼마나 소중했던지요.


남몰래 흠모하는 이에게 거꾸로 흠모하는 마음으로,라는 말을 듣는 일은 오밤중 비밀 편지에 더없이 적당한 문장입니다. 저는 당신의 이야기가 늘 궁금했어요. 블로그에 올라오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자신을 통과한 문장들이었어요. 자신에 대해 한 발 떨어져 끊임없이 보고 또 보는 사람, 궁리하고 탐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자의식 과잉이나 자기애가 넘치는 것과는 달라요. 그저 자신을 보는 거죠. 내가 누구인지,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얽매여있던 것은 무엇인지를 천천히 응시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궁리하고 기록하죠. 제게 당신은 그렇게 삶을 여행하는 탐험가처럼 보여요. 당신의 단단하고 열정적인 걸음이 부러워 뒷모습만 물 끄러니 바라보고 섰습니다. 제게도 그런 날이 올까요? 들뜨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저 나 자신으로 충분한 고요한 날들이요. 당신이 쓰던 글이나 소설 속에서 짧게 스쳐보던 당신의 더 많은 생각이 늘 궁금해요. 당신이 더 길게 길게 써주시길 바라고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당신 생각을 읽을 수 있다니 공짜로 세상을 배우는 기분이에요.


'담엔 산책 모둠을 맞춰볼까?' 오늘의 심쿵 문장입니다. 이건 정말이잖아요. 당신과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하는 마음을 이렇게 담백하고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나요? 제겐 그런 용기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질문에 '네 정말로요!'하고 대답할 용기는 있답니다. 물꼬방은 참 좋고도 어려워서 저는 잘하고 싶고 애쓰고 싶으면서 동시에 달아나고 싶은 알 수 없는 마음을 느껴요. 너무 소중해서 아예 갖기 싫은 보석처럼요. 어떤 욕심을 버리지 못해 마음이 그토록 초조할까요. 결국엔 누군가의 사랑, 인정. 그런 걸 원하는 걸까요? 나는 왜 나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남들에게는 너로 충분하다고 말하면서. 나는 왜 다른 대상을 통해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없겠죠. 하지만 천천히, 차분히 나로 충분한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려고 편지를 썼어요. 제 마음을 쓰고 싶어서요. 당신의 마음을 귀가 부스러지도록 듣겠다고 하고선 결국 제 마음을 흠뻑 쓰고 말았어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도 사랑이길 바랍니다. 제 첫 번째 편지의 주인공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잊지 못해요.



당신을 더 가까이 느끼고 있는 봄곰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에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싶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는 이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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