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여왕 1

by 남몰래

우주의 여왕이라고 했다. 버드나무 초록 잎이 빛에 너울대던 여름날 우리는 작은 마을의 연못 둘레를 같이 걸었다. 여왕님이 웃을 때마다 빛보라가 차르르 귓바퀴를 타고 흘러 마음은 중력을 벗어나 자꾸만 달아났다. 그것이 어디를 향하는지, 그것이 옳고 그른지 단속할 새 없이.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지 따질 새 없이. 그 웃음소리는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는 손가락들처럼 내 몸을 파고든다. 나는 그 소리가 좋아 자꾸만 여왕님을 웃길 궁리를 한다. 여주야, 오늘 너 만나러 오는 길에 달팽이가 길을 건너는 걸 봤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 달팽이가 길을 건너? 대박이다 정말. 여주의 웃음은 여름빛만큼이나 넘쳐서 그 소리를 듣는 일은 양산만 쓰지 않으면 여름 해를 실컷 쬘 수 있는 것처럼 넉넉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우주의 여왕이라고? 역시 우리 여주는 스케일이 커. 이 동네도 아니고, 이 나라도 아니고, 우주라니. 내 여자 친구가 우주의 여왕이라니! 그럼 난 우주의 왕이네? 놀리는 말에도 아랑곳 않고 여주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난 특별 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라 이 별에 여행을 온 거야. 긴 수학여행 중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여왕이라면 자기가 거느리는 별을 속속들이 알아야 하잖아. 하하하하하하하.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웃는 건 여주의 습관 중 하나였다. 활짝 웃어 젖히고 나서는 내 웃음소리가 너무 컸나? 내 뒤로 숨으며 남은 웃음을 키득대는 것도.


지방에서 올라와 기숙사에 떨어지고 한 달에 25만 원짜리 공용 화장실이 딸린 방을 구해 자취를 시작하던 봄이었다. 3월이라곤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차가웠는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의 옷차림은 마음만큼이나 가벼웠다. 어울리지도 않는 바바리코트를 입거나 교복과 별 차이 없어 보이는 재킷을 공들여 입은 아이들 틈에서 너무 촌스럽지도, 그렇다고 너무 튀지도 않게. 그저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오가던 학교 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선배들이 들이붓는 술은 고등학교 때부터 홀짝홀짝 마시던 소주 덕에 새로울 것이 없었고, 새침한 여자애들은 애매하게 예뻤다. 마음에 들게 예쁜 애는 내 여자친구는 안 될 것 같고 내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애들은 눈길이 안 가서 꼭 맞게 예쁜 애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 애를 찾기란 영영 어려울 것 같아 방이 나란히 붙어 있는 자취방에서 소리 없이 자위하는 걸로 외로움을 달랬다. 지긋지긋한 동네를 벗어나 대학에 왔는데 다시 지긋지긋해지는 일상이라니. 대체 이 지구를 떠나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차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금 간 마음의 틈으로 강렬한 빛이 들이치는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음감실 입구에서 여주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깔깔대고 있었다. 모두가 웃고 있었는데 그 소리의 데시벨이 정확히 내 귀를 관통했다. 여주가 예뻤나? 이를 다 드러내고 환히 웃는 모습이 예뻤던 것도 같은데 그보다도 그 소리가 자꾸 마음을 끌었다. 친구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여주가 음감실로 들어가는 걸 보고 무작정 따라 들어갔다. 그 애가 일어나 신청곡을 쓰고 '메트로폴리스'가 울리고 소파에 몸을 파묻고 봄햇살도 어쩌지 못하는 지하 1층 음악 감상실에서 오후 내내 나는 그 애와 같은 소리를 들었다. 과학교육과 1학년 신여주. 같은 사대 건물에 있었을 텐데 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을까? 스토킹 같은 걸 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그냥 자꾸 그 애가 궁금했다. 음감실에서 나와 사대 건물로 들어갈 때, 국어과를 지나 과학과 과방으로 들어갈 때, 1학년 아이들이 듣는 교육학 책을 들고 '신여주'라고 큼직하게 적힌 책을 끼고 나올 때, 친구들이 여주야, 부르는 소리에 응. 하고 답할 때. 나는 여주가 내는 모든 소리가 순식간에 좋아졌다. 그 웃음 소리를 내내 들을 수 있다면 지구에 사는게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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