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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KGOD Oct 09. 2019

금연과 일기

1일차

12:50.

마지막 한개비를 바람결에 날리고 생각했다.


'...해볼까.'


금연시도는 손가락 발가락 다 동원해도 모자랄만큼 많았다. 큰 계기도 없었고, 말 한마디면 얻을 수 있는 담배 한개비는 어렵지 않게 담배 한 갑으로 이어졌으니까.


한 발 떨어져서 내가 담배를 끊어가는 모습을 글로 남겨보면 어떨까. 내심 생각해왔던 글 주제였다. 불현 듯이 생각났으니, 쇠뿔도 단김에 시작해봐야지.


하지만 이제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라이터는 버리지 않았다.

담배를 끊겠다고 다짐하면서 내다버리고, 다시 산 라이터만 몇 십개는 될터이니.


잠깐이지만 깔끔하게 담배를 끊고, 불만 붙여주는 용도로 라이터를 들고 다니는 나를 상상해본다.

안들고 다니는게 더 맞는 거 같긴한데.

그런걸로 대리만족하며 재미를 보는, 조금은 멍청한 나를 상상해본다.


14:03

한시간 근무가 끝나면 쉬는 동안에 자동으로 입에 담배가 물린다. 그까짓 한시간 노동이 뭐 그리 힘들다고 고단함을 달래는 척 하는건지.(사실 그냥 습관에 가깝지만)


기록된다고 생각하니 몸이나 마음이 알아서 자중하는 느낌이다. 지금도 이 배 아랫쪽이랑 가슴언저리에서 살살 담배 피자고 말을 거는 것 같다.


흡연욕구를 참는 게 마냥 '으... 굳이 끊을 필요가 있을 까...?' 하면서 힘들기만 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뭐랄까.

내가 괴로워하는 걸 즐기면서 기록하는 느낌...?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거듭된 금연 실패로 나를 믿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섣불리 금연 성공의 첫 발걸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다.

으.

방금 말 한마디면 담개 한개비를 가볍게 얻을 수 있는 흡연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난리났지 아주 내 몸뚱이들.

피고싶냐? 야, 피고 싶냐? 프히히히


14:59

이제 근무 나가려니까 못 피고 나가서 몸이 징징대는 듯하다. 야, 야. 우냐? 피고싶냐? 푸히ㅎㅎㅎㅎ


15:17

근무 서는 중인데 아주 태연하게도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담배 하나 빌려서 피자.'

어디 더 유혹해봐. 더! 더!

바로 적는다. 바로 적을거야. 계속 계속 유혹해봐. 더!


15:23

내가 근무 들어오기전에 급피곤해서 잠깐 엎드려 누웠었다. 지금도 하품 중이고.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윤부장님의 금단현상이 떠오르면서 내가 나에게 속삭인다.


'야. 넌 금단증상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지금 이거 금단현상인 거 아니야? 어떻게해!'


뭘 어떻게해. 내가 어쩌길 바라. 말해바. 더 말해보라고~

ㅎㅎㅎㅎ


15:30

자기합리화라는 건 대놓고 설득하는 건 줄 알았더니, 살살 부추기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게 자기합리화였다. 하나 하나에 의미부여를 해가면서 속삭임에 설득력을 높여 기하급수적으로 몸집을 불려가는 눈덩이 같은 녀석 인 것이다.


15:57

근무 막바지, 흡연장쪽으로 걸어가는 이름모를 두 남자에게 흡연자의 기운을 느끼며 몸이 두근하고 뛰었다.

어이어이. 그런 취향 아니잖아. 오해받고 싶어? 어?


19:28

퇴근길이기도 했고, 하고있는 게임에서(라이즈오브킹덤) 연맹 단체 이주하고 난리도 아니라 휴

권기사님이 담배피러 가는 타이밍도 넘겼고, 팀장님께서 담배 필 사람 빨리와! 라는 퇴근 막바지 외침도 넘겼다. 물론 몸이 꿀렁하고 넘어가는 느낌이 아주 강했지만 흔들리는 날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19:36

화곡역에서 집으로 걸어가던 중 담배피는 사람을 보고 살짝 눈을 떼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심지어 타이밍 좋게 침까지 꼴깍 삼켰는데..... 그정돈 아니지 나녀석아?응? 대답해. 야. 우냐?


21:58

아직도 저녁을 안 먹어서, 라면 사다가 역시나 또 단백질 폭탄 라면 먹을 까한다. 하지만 역시 또 어려운 곳이다.

편.의.점.

정확히는 집 앞 cg편의점이다. 당연히 담배 사러 많이 들렀고, 지금 또 혼자 딱 밤거리도 거닐겠다, 완벽하게 담배 사서 피고 할 타이밍이거든.


여기만큼은 못 참을걸?


이라며 신나서 몸이 들뜬게 느껴진다.

무슨 금요일 퇴근 5분 전처럼 들뜨고 지랄임.

별다른 의미부여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느껴지는 그대로를 적으면 됨.

뜬금없이 여기까지 참은 것도 얼떨떨하기도 하고 당장이라도 실패해서 담배를 물 것 같기도하고 그럼.


22:06

막상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니까 갈등(?)이 생기진 않았다. 욕구라고 해야하나.

일단 밖에가 진짜 추워졌다. 어우 겨울날씨다 갑자기.

이것보다 더 추운 날도 기어나와서 담배를 펴왔지 난...

담배를 안 피도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다.


23:15

문영이가 빨래 걷어와달라고 해서 옥상왔다.

옥상도 어지간히 감성 빨면서 담배를 많이 펴대서... 흡연욕구가 강하게 두근했다.

시발 안 두근 거리는 곳이 없어

심지어 문영이가 '옥상'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부터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굳이 옥상을 가야할 일이 생기면 '나간김에 담배'. 이게 거의 공식이기 때문이다.

어영부영 자기직전까지 안 피고 있긴하다.

좀 더 낱낱히 담배에 반응하는 내 마음과 몸을 적어보고 싶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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