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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KGOD Oct 10. 2019

금연과 일기

2일차

07:25

슬쩍 잠에서 깨어 부스스하게 눈 껌벅이는 중, 뜬금없이 훅 치고 들어왔다.

'담배피자!'

거의 권유하는 끈질김으로는 광신도 뺨 두어번 치고 꿀밤 먹이고 다리 걸어서 바닥에 메치는 수준인 듯하다.

그리고 이렇게 바로 낱낱히 적을라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의 요동(?)이 쏙 가라앉는다.

이건 케바케지만.


11:43

오늘은 우리 TTT크루의 공식행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JB대전(좆밥대전)'을 하러 가는 길이다. 집 앞에서 버스 탈 때는 별 생각없었는데, 이게 또 본동시장 앞쪽에 내리고 느낌이 오더라.

왜냐하면 내리자마자 조금 큰 GS편의점이 있는데, 거기서 담배를 사기도하고 간단하게 아침거리를 사가기도 해서 그렇다.

이런식이면 저어기 장미아파트 아래 cu편의점도 두근거릴 듯. 내 심장이 이렇게 헤픈 녀석이었다니.

그리고 쓸 타이밍을 놓쳐서 기억은 잘 안나는데 자기합리화는 은근슬쩍 시나리오도 쓴다. 내가 무언가 상상을 하고 있으니까, 슬쩍 발을 걸쳐서 흡연욕구를 부추기는 상상 말이다.

자기합리화라는 건 얼마나 기상천외한 녀석인지....

시간을 들여서 찬찬히 지켜보는 맛이 있다.


아 맞다. 누군가 아프거나, 돌아가시거나 그러면 충격에 피지 않을 까 하는 상상이었을 것이다. 호텔에 자주 오시는 택시기사중 한 분이 4년을 끊었다가 친형님이 돌아가셔서 다시 피우기 시작하셨다고 하셨으니까.


자기합리화는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싸이코패스적 기질을 보이기까지 한다.


11:52

엄청나다.

왜냐하면, 방금 이걸 시작하고나서 가장 크게 흡연욕구가 목소리를 키웠기 때문이다.

강서클라이밍장에서 진석이형님 뵙고 가기로 했는데 이 형이 조금 늦는다고 했다.

근데 담배는 무엇이냐. 그냥 시간 빌 때. 여유가 생겼을 때. 잠깐 짬이 날 때. 하나씩 펴주는 맛인 것이다.

이걸 쓰고 있는데도 이 때다 싶어서 목소리를 키우는게 무섭기까지 하다.


내가 이 앞에서 담배를 자주 폈응께 그런 것도 있다. 언제든 담배를 다시 사서, 피는 건 아주 쉽다. 아주 아주.

편의점은 어디에나 24시간 열려있고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16:12

JB대전을 무사히 끝냈다. 경록이형이 몇 번 꼬셔서 위기 비슷하게 왔지만, 솔직히 크루 안에서 지금 나랑 경록이형만 담배 피는데, 경록이형이랑 묶이기 싫었다. 솔직히.


기왕 참은 거 그냥... 일기 더 적으면서 참아보고.

옆에서 해람이형이 말하기를, 인생의 그레이드도 같이 올릴 기회 아니냐.

맞는 말이다.

근데 굳이 의미부여 더 하지 않아야지.


18:13

집에서 출근하는 길, 화곡역에 도착하기전에 지하철 시간을 확인하고 시간이 남으면 하나 피고 가는게 거의 정해진 일과이자 루트였다.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앞에서 담배를 피는 모습을 상상했다. 한켠으로는 내비게이션이라도 켜진 듯 근처 편의점의 모습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대단하다.

뭔가 다른 것들이나 이렇게 떠오르면 참 좋을 것 같다.

대회가 끝나고 나서가 확실히 좀 욕구가 올라오긴 했다.

강클에 도착했는데 담배피는 클라이머들....

그와중에 해람이형은 편의점에 들러서 달달한 것 좀 사가자고 했다.

속으로 '으악'이라고 외쳤지만 이내 정신차리고 차 얻어탄 값으로 초콜렛바를 사서 건냈다.

담배 사는 것보다 훨씬 뿌듯하다.

아니, 비교불가지... 애초에...


그냥 지금은 인생의 그레이드를 올리고 싶을 뿐이다.

아, 자꾸 머리 속에 맴도네.


18:42

근무 투입하기 전 대기하는 중.

같이 담배 피기 좋은 파트너 권기사님과 종진이형이 있는 가운데. 괜히 나 혼자서 긴장하고 있다.

이때다 싶어서 못 이기는 척 같이 담배 피러가는 상상을 떠올린다. 자기합리화는 상상력도 뛰어나고, 심리묘사도 상황표현도 아주 뛰어나다.


18:49

종진이형이 같이 피자는 걸 거절하니까 종진이형이 잔뜩 삐진 척한다. 동원쓰와 함께 못 이기는 척 같이 나가고도 안 피웠다. 들어오는 길에 스쳐지나가는 권기사의 권유도 물 흐르듯 밀어낸다.

의미부여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자.

어차피 밀어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듯, 다시 피는 건 더 어려운 일도 아니다.

피고싶어하는 흡연욕구가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아 가는 애처럼 징징대다가도 '어차피 내가 이겨!'라며 내심 속삭인다.


19:12

근무서고 있는데 뜬금없이 집에서 밤에 시간 비는데 담배 피는 상상함. 박제.


23:30

중국 고객 두명이 빡촌을 자꾸 찾다가 아무튼 실패했다. 열심히 맞춰줬더니 고맙다고 담배 하나를 건냈다. 지네 장관이 구해와달라고 했다나 뭐라나. 금박지 쌓여있어서 좋아보이긴 했다.

이때다 싶어서 또 열심히 자기합리화가 소리쳤다.

'이건 선물이잖아!'

그럼 권기사가 피러가자고 할 때마다 선물이라고 부담갖지 말라고 하나씩 내밀면 필거냐?

솔직히 이거 피고나서 계속 참을 자신은 있고?

'필요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필 자신은 있고?


암튼 그냥 권기사 후딱 가서 줘버림.


23:57

감당할 수 있겠냐고 속에다 물어보자마자 그렇다고 말을 한다. 그렇지 않은 걸 알면서도 애써 구라치는 목소리톤이었다.

방제실 들어오기전에 간지나는 외국손님 담배피러 가는거 문 열어줬는데, 맛나게 피는 거 보니까 쩝 ㅎ

스스로 이런 반응이 나오긴 한다.

어영부영 잘 참고 있네.


08:36

야식먹고 권기사랑 쓰레기 같이 버리러 나가고도 안폈다. 사실 이 때는 그닥? 같이 피던 사람들한테 '아니요'할 때마다 저항력(?)이 생기는 거 같다.

중간 중간에도 뭐 있었는데(방금 생각난 건 이제 근무 투입하러 가는 종진이형한테 내가 담배피러 안가냐고 물어보는 상상. 개어이없음. 무슨 일어날 일을 예행 연습시키는 것도 아니고 ㅋㅋㅋㅋ이건 뭐 사건 덮는 국가기관급 공작) 달빛조각사 게임 오픈한 거 하기 바빠서 못 적은 것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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