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이 보인다. 방바닥도 보인다. 누런 종이를 바른 옛날 방바닥. 낡고 해진 소맷단도 보였다. 내 손 맞는데, 손톱 끝에 물감 찌꺼기가 묻어있다.
나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있었다. 얼마나 오래 엎드렸는지 발이 저렸다. 발이 저려? 가위눌렸나. 낮잠 자면 꼭 이런다니까.
‘무슨 꿈이 이래?’
고개를 들려고 목을 움직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목덜미를 찔렀다. 허걱, 아프다. 서늘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기운이다. 칼은 아닌데 뭐지?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드느냐?”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이다. 남자 목소리인데, 나이는 어리다. 내 또래 정도일까.
곁눈질로 보니 두꺼운 천으로 만든 장화가 보였다. 사극 드라마에서 무관들이 신고 다니는 시커먼 신발이다.
누구인지 올려다보려는데, 뾰족하고 차가운 것이 목덜미를 더 세게 찔렀다.
“아윽!”
너무 아파서 신음이 나왔다. 이거 꿈 아니었어? 왜 이렇게 아파!
어떻게 된 거지? 할아버지 창고에 있었는데.
그림이 꾸물거리고 세상이 하얗게 바뀐 것까지는 알겠는데. 설마… 그림 속으로 들어왔나? 할아버지가 그린 그림 속으로?
꿈 같은데, 또 꿈이 아닌 것 같고. 여기가 어디지? 진짜 할아버지의 그림 속이라면… 설마 율도국?
저고리 안쪽에 미지근하고 딱딱한 것이 들어있다. 붓 통을 언제 품속에 넣었냐. 지금은 뜨겁지 않다.
꿈인지 뭔지도 모르겠고, 발은 저리고, 얼마나 오래 엎드려있었나 숨이 막혀온다. 날 공격한 것은 뭐냐?
용기를 내어 올려다보았다. 검집이다. 검도 아니고 검집이 이렇게 무서워?
무술은 잘 몰라도 저 기운은 알겠다. 엄청난 내공이다. 검집에서 나오는 기운이 이토록 강하다면, 검술은 얼마나 뛰어날까.
“어서 말하지 못할까!”
나이 어린 무사가 소리쳤다. 무슨 말을 하라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무영아, 그만하거라. 갑자기 끌려왔으니 황망하겠지.”
“예. 대군마마.”
무영이라는 무사가 검집을 거두었다. 얼마나 세게 눌렸나 목이 뻐근했다. 대군마마? 왕의 아들인가?
“네가 그림을 읽을 줄 안다고?”
“예?”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읽다니 무슨 소리냐. 왕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어려도 목소리가 엄숙하고 무게 있다. 대군이 명령했다.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여라.”
나도 궁금하던 차였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알아내야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탁과 책장, 병풍, 창호지를 바른 창살문이 보였다. 양반집 사랑방이구나. 할아버지의 만물상에서 팔던 물건이 많다. 드라마에서도 자주 봤고.
서탁 건너편에 한 소년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 표정이나 태도가 상당히 어른스러웠다.
얼굴도 깨끗하고 코도 오뚝한 것이 잘생긴 얼굴이다. 옷도 고급스럽고, 검은 두건에도 금실로 수를 놓았다.
“아직 어리구나.”
대군이 말하자 무영이 대꾸했다.
“올해 열일곱이랍니다. 부모도 모르는 떠돌이인데, 꾀꼴산 화곡에는 석 달 전에 들어왔답니다. 화곡에 그림쟁이는 이 아이뿐입니다.”
무영의 목소리에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곁눈으로 보니 몸집이 날렵하고 눈초리가 매섭다. 검은 무사복에, 서 있는 자세나 허리에 찬 장검도 심상치 않았다. 고수의 아우라가 뻗쳐 나온다. 무조건 조심하자.
“일을 맡길 수 있는지… 시험해야겠구나. 이름이 뭐라고?”
“정지민이라 합니다.”
나는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무영이 먼저 나섰다. 여기서도 이름이 정지민이구나. 그런데 왜 부모 없는 떠돌이에, 냄새 나는 누더기를 입었어? 이왕 꿈꾸는 거, 양반집 아들이면 얼마나 좋아. 왕도 괜찮고.
앞에 앉은 대군은 천천히,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정 화공. 여기 걸린 그림을 읽어 보거라. 네 재주가 어떤지 봐야겠다.”
“예에?”
뭘 하라고? 귀를 의심했다. 이거 미션인가? 게임에서 이런 설정 많이 봤다. 미션을 완수해야만 현실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그걸 왜 해야 해? 꼭 현실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 계속 있으면 수능을 안 봐도 된다. 시험지옥에서 해방되는 데다 취업 준비한다고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스트레스는 왕창 받으면서 집도 마련하고, 차도 구하느라 죽도록 일해야 한다. 지긋지긋한 학교에 안 갈 수 있는데 왜?
“그림을 못 읽으면 어떻게 되나요?”
목이 콱 막혔다. 소리가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무영이 코웃음 쳤다.
“군주를 기만했으니 목숨으로 갚아야지.”
무영은 다짜고짜 칼을 빼 들었다. 스르륵 칼날이 번쩍였을 뿐인데, 소맷자락이 소리도 없이 갈라졌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살갗을 비켜 지나갔다. 그 서늘함에 소름이 돋았다. 차갑게 번쩍이는 칼끝을 보니 머리털도 쭈뼛 섰다.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꿈이 아니야!
여기서 죽으면 끝이다. 안 되겠어. 엄마 아빠가 걱정할 테니 돌아가야지. 할머니도 걱정하실 거고. 잘하는 건 없지만, 그래도 난 착한 아들이고, 착한 손자이니까.
“예, 그럼요. 어, 어떤 그림요?”
무영이 벽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사랑방에 어울리는 책가도였다. 책꽂이에 책이 가지런히 꽂힌 그림.
예의상 보는 척만 하려는데, 그림이 꾸물거렸다. 그림 속의 책이 휘리릭 펼쳐지더니 글자가 보였다.
‘연암대군 홍빈, 이 집의 주인이다. 올해 열일곱. 가련하게도 시대가 혼탁하여 언제 꺾일지 모르는 갈대로구나.’
이게 왜 보이는데? 소리는 왜 들리냐고! 여기 들어오면서 요상한 재주를 가졌나? 뭐? 지금이 혼탁한 시대라고? 예감이 안 좋다. 까딱하면 죽게 생겼다.
에잇, 소리 나지 않게 혀를 찼다. 다리가 후들거려 간신히 일어났다. 비틀비틀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이 멋대로 떠들어댄다.
‘지난해 세자 홍유가 병사하고, 아직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나없이 자리를 두고 다투는구나.’
그러니까… 지금 나는 권력다툼의 중심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연극부 같은 작은 동아리도 시끄러운데, 세자를 두고 싸운다면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다. 이런 건 싫은데.
무영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처음부터 나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내 움직임 하나하나를 노려보고 있다. 교실 뒤편에 모여 섰던 덩치들과 비슷하다. 저 녀석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연암대군도 일어나 옆에 걸린 그림 앞에 섰다.
“여기 그림 세 장 중에서 내가 그림을 찾아라.”
벽에는 세 개의 족자가 걸려있었다. 책가도와 산과 계곡을 그린 산수화, 난초를 그린 문인화였다. 누가 그렸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모두 다른 사람의 그림 같은데.
나는 무영의 눈치를 보며 문인화 앞에 섰다. 그림에게 물어볼 수밖에.
‘이봐, 대군마마가 그린 그림이 너냐?’
대답은 안하고 키득거린다.
‘주인님이 문제를 냈잖아. 알려주면 반칙이야.’
치사하게 군다 이거지. 할 수 없다. 찾는 척이라도 하자. 그림에 정신을 집중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지. 그림에서 화가의 기운이 흘러나온다고. 정성을 다한 그림에서는 그 기운이 더 강하다고.
먹선에 실린 힘은 화가가 젊다는 뜻, 기술이 뛰어난 건 잘 배웠다는 표시. 그러나, 깊이는 얕아. 아직 어리다는 거지. 그렇다면….
“세 장 모두 대군마마께서 그렸는데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연암대군과 무영은 말이 없었다. 당황해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림이 혹시 다른 말을 할까 기다렸지만, 더는 소리도 글자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그림은 없나? 벽을 따라 책장을 돌아보았다.
책장 선반 위에 낯익은 항아리가 보였다. 할아버지의 만물상에 있던 붓꽂이와 똑같다. 이게 진짜라면 바닥에 푸른 문양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안다.
“이것 좀 봐도 되겠습니까?”
연암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얀 항아리를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예상대로 푸른 호랑이가 새겨져 있다.
“대군마마가 세자가 되시겠네요.”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무영이 소리쳤다. 연암대군이 항아리를 받아서 들었다.
“무슨 뜻이냐?”
“푸른 호랑이는 율도국을 평정한 홍길동님, 아, 여기서는 대선조라고 부르지요. 여하튼 그분을 나타내는 문양입니다. 대대로 가장 믿음직한 왕자에게 전해집니다.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뜻이죠. 이건 언제 받으셨습니까?”
어라? 내 말투가 왜 이래! 생각과는 딴판으로 입이 저절로 움직인다. 반가운 물건을 봐서 그런가. 말이 술술 나왔다.
연암대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호랑이 문양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군이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항아리 바닥의 푸른 선이 꾸물거리니까. 그림이 알려줄 거다.
‘빈아, 여섯 살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성현의 말씀을 터득했구나. 기특하다.’
여섯 살? 그럼, 형인 홍유가 세자가 되기 전에 이걸 받았다고? 항아리의 의미가 진짜라면 처음부터 세자가 되었어야지. 율도국도 조선이랑 비슷하니까 맏이가 우선인가? 어쨌든, 다음 세자는 내 옆에 있는 연암대군 홍빈이다.
그러나 연암대군은 기뻐하지 않았다. 조용히 항아리를 선반에 올려놓고 붓을 꽂았다.
“네 재주는 알겠다. 과연 꿈에서 일러준 대로구나.”
나랑 나이도 비슷한데 왜 이렇게 무게를 잡아? 연암대군이 무영에게 손짓했다.
“가자. 그림을 찾아야지.”
연암대군은 뒷짐을 지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뭐야? 미션 끝난 거 아니었어? 진짜 퀘스트가 따로 있다고?
엉거주춤 선 내 어깨를 무영이 툭 건드렸다.
“따라와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참자, 참아.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