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림 읽는 재주

by 록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려서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기서 처음 눈 떴을 때보다는 많이 익숙해졌다.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 눈을 가린 채로 말에 오르고, 무영의 뒤에 앉아 흔들려도 중심을 잘 잡았다. 나는 몰라도, 내몸은 이쪽 세계를 잘 아는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말이 멈춰 섰다. 무영의 소매를 잡고 흙길과 돌길을 번갈아 걸었다. 문턱도 넘고 계단도 오르내렸다.

끼기긱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고 나서 무영이 눈가리개를 풀어주었다.

“이곳은 진보전이다. 왕실의 보물을 모아놓은 곳이지.”

연암대군이 말했지만, 보물은 보이지 않았다. 앞에는 창살문 여섯 개만 차례로 나 있었다.

저 문으로 들어서면 복잡한 미로가 이어진다. 그중 다섯 개는 함정이라 빠지면 즉사할 것이다. 갑자기 몸이 바짝 굳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 때문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지? 왜 아는 거냐고!


문 위에는 작은 그림이 두 장씩 붙어있었다. 십이지 장군 그림인데, 두 명씩 마주 보고 서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림이 스르르 움직였다. 원숭이와 닭 장군이 차렷 자세로 서더니 내게 꾸벅 인사했다.

“어느 문인지 알겠느냐?”

“예. 저기 신유문입니다.”

연암대군과 무영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놀라서 입이 굳었다. 뭐야? 내가 왜 이것도 알지? 원숭이가 ‘신’, 닭이 ‘유’인 건 어떻게 아냐고.

그림 읽는 재주가 이런 거였어? 잘하면 무사히 빠져나가겠는데?

“과연 대단하구나. 들어가자.”

연암대군이 앞장섰다. 문 안쪽은 길고 좁은 복도였다. 복도를 따라가니 여러 개의 갈림길이 나왔다. 연암대군은 능숙하게 이리저리 길을 따라갔다.

안내판도, 그림도 없지만 누군가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걸 만든 수많은 장인, 도둑질하러 들어왔다가 죽은 사람들, 이곳을 지나다니던 왕과 왕족들의 기억이.

진보전은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아서 한번 고인 기억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언뜻언뜻 사람들의 모습이 지나갔다. 그때마다 뒤를 돌아보았다.

“도망칠 생각 마라. 여기는 대사님이 만든 미로니까.”

무영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쳇, 왜 도망쳐? 세상에 그림 읽는 재주꾼이 그렇게 흔한가? 임금도 날 못 죽일 걸.

연암대군을 따라가며 보니 뒷모습이 낯익다. 목소리도 낯설지 않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아하, 연극부실! 그 하얀 안개.’

창문에 비친 안개 속 실루엣과 닮았다. 뭘 찾겠다고 하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도 날 알고 있다니 신기하다.

“대군마마. 제가 그림 읽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제 꿈에 나오지 않았느냐. 사라진 그림을 찾고 싶다면 화곡에서 널 찾으라고.”

“제가요?”

아닌데. 내가 그럴 리가. 응? 화곡…? 익숙한 이름이다. 할아버지 만물상이 화곡동에 있었지.


앞서가던 연암대군이 멈춰 섰다. 막다른 벽에 다섯 개의 민화 족자가 걸려있다. 사랑방에 딱 어울리는 세로로 긴 그림. 맨 오른쪽 자리는 자국만 있고, 그림은 없다.

내가 가까이 가자 그림 속 동물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연암대군과 무영은 그림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두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장생도에는 사슴과 소나무가 있고, 멀리 폭포에서 물이 떨어진다. 그림 속 사슴이 내게 속삭였다.

‘대사님이 사라지고 괴이한 사건이 끊이지 않습니다. 벌써 이십 년이나 되었습니다. 요괴들이 난동을 부리며 사람을 괴롭힙니다. 부디 세상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바로 옆, 묘접도에서 고양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요괴가 흩어놓았다옹. 여섯이 함께 있어야 대사님의 힘을 지킬 수 있다냥. 사슴이만 임금님 침전에 남고, 난 농사짓는 노인에게 버려졌다옹.’

묘접도 속에서 나비가 팔랑거리니 고양이는 말하다 말고 나비와 놀기 시작했다.

이어서 모란도, 책가도, 어변성룡도가 차례로 자신이 어디에 버려졌는지 말해주었다.

화려한 모란은 포목점 하는 여인에게, 책과 문방구가 그려진 책가도는 세책방, 물결 위를 뛰어오르는 어변성룡도 속 물고기는 어물전에 십 년 넘게 있었단다.


물고기를 보고 어변성룡도라고 알아낸 내가 뿌듯했지만, 잠깐이었다. 그림이 서로 말한다고 나서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필요한 정보는 다 모았다. 진보전에서 그림이 사라진 것은 십오 년 전이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리더니 보물창고에서 그림만 사라졌다.

장생도 한 장만 왕의 침전에 남고,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동안 왕궁의 비밀수사대가 하나씩 찾아냈다.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한 장 한 장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섯 번째 그림까지 찾고 칠 년이 지났지만, 남은 한 장은 깜깜무소식이다. 단서 하나 찾지 못했다. 대왕 요괴가 결계를 쳐서 자기들도 볼 수 없다나.

뭐야? 대왕 요괴는 홍길동이 없앴는데? 그것도 율도국을 평정하기 전에. 여하튼 연암대군은 여섯 번째 그림을 찾으려고 나를 데려왔다.


연암대군이 내 옆으로 가까이 왔다. 벽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어떤 그림이 걸려야 하느냐?”

알면서 왜 물어? 어이없지만, 대군에게 말대꾸할 수는 없지. 십오 년 전이면 연암대군도 두 살이었으니, 실제 그림은 보지 못했을 거다.

“호작도입니다. 호랑이와 까치가 마주 보는 그림이지요.”

나는 그림 속 물고기가 뻐끔거리는 대로 술술 읊었다. 그림 읽는 재주로 목숨은 구하겠구나.

“또 뭔가 알아냈느냐?”

“저기….”

어지럽게 떠오른 생각을 모아보았다. 다른 그림이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 따져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장생도를 제외하면 모두 평민이 갖고 있었습니다. 묘접도는 농사꾼의 집이었지요. 곳간의 쥐를 잡는 뜻으로 그림을 아꼈다고 합니다. 모란도는 자수 솜씨 좋기로 유명한 여인이 갖고 있었고요. 책가도는 세책방의 다른 책가도와 섞여 찾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변성룡도는 시장의 어물전에 걸려있었고요.”

“그래서? 그림은 어디 있냐고!”

무영이 으름장을 놓았다. 한쪽 손으로 칼집을 꽉 붙들었다.

“호랑이가 사는 곳 아닐까요? 깊은 산….”

“이 나라에 산이 한두 곳이냐?”

무영이 화를 내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어쩌라고! 이 정도 알아낸 것만 해도 놀랄 일 아냐? 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정 화공. 나는 너를 믿는다.”

연암대군이 뒷짐을 지고 그림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알겠지만, 상황이 아주 곤란하다. 국경의 오랑캐부터 내부의 적까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아이들이 떠드는 노래를 들어본 적 있느냐?”

“아니오.”

노래라니. 그건 모르겠는데. 연암대군이 손짓하니 무영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노래가 아니라 책을 읽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길을 잃었네. 하늘이 우르릉

어두운 하늘 버리고 새 하늘을 열겠다. 콰르릉

붉은 잎 지면 푸른 싹 돋으리니

에헤야 풍년 온다 에루화 태평성대.“


무영은 엄청난 음치였다. 웃음이 나왔지만, 너무 진지해서 웃지 못했다. 가사의 뜻을 따져보니 웃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연암대군은 벽의 빈 곳을 바라보았다. 여섯 번째 그림이 걸릴 자리이다.

“누군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용상을 노리는 역도의 무리겠지. 요괴와 손을 잡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어.”

내가 율도국 사정을 어떻게 압니까? 답답하지만, 바로 옆에 구원군이 있었다. 그림 속 사슴과 고양이가 번갈아 속삭였다.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이 많다냥. 이전 율도국을 다스리던 왕족의 후예들과 활빈당의 후손들이라옹.’

‘또 있습니다. 개혁을 주장하는 대신도 많습니다. 새로운 나라로 바꾸겠다고요.’

‘맞아요. 높은 벼슬에 오르고도 더 큰 욕심을 내다니요.’

모란도 꽃잎을 찰랑거리며 한숨 비슷한 소리를 냈다.

이 얘기, 할아버지에게 들었다. 그때는 어려서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런 내용이었구나. 그걸 아직도 기억하다니 내 머리도 나쁘지 않은걸.


‘율도국에는 왕을 몰아내려고 세력을 키우는 자들이 있지. 지민아. 넌 누구 편에 서고 싶으냐?’

할아버지의 질문에 다 나쁘다고 대답했다. 난 무조건 싸움이 싫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도 아픈데 왜 서로 치고받고 싸울까.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게 도우면 되지 않아요?’

‘그렇구나. 그럼, 네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잘 지키려무나.’

할아버지는 내게 당부하셨다. 율도국 사람들을 잘 지키라고. 그냥 옛날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문제가 있다. 상대가 사람이면 무기로 싸우지만, 이 세계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요괴가 수만 마리는 될 것이다. 사람과 계약을 맺고 사람을 이용한다.

책가도 속의 책이 활짝 펼쳐지며 해괴한 요괴들을 보여주었다. 역사서가 되었다가 요괴 사전도 되나 보다. 다른 그림도 서로 말한다고 나섰다.

진짜 정신없네.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떠들어대니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숨을 가다듬고 연암대군과 무영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이럴 때 대사님이 계시면 좋으련만. 흔적도 못 찾았느냐?”

“예, 이십 년이나 지났으니, 대선조를 따라 선계로 떠났다는 소문입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우리에겐 정 화공뿐이구나.”

연암대군은 나를 향해 돌아섰다.

“말해 보거라.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아휴, 그걸 알면 내가 먼저 나갔지. 사정은 딱하지만, 알 길이 없다. 가만, 율도국 왕자면 홍길동의 후예잖아? 그럼, 연암대군도 도술을 배웠을 거 아냐?


“홍길… 아니, 대선조님이 도술에 능통하셨는데, 왕가에 그 비법이 내려오지 않습니까?”

“어디서 감히…!”

무영은 눈을 부릅떴고, 연암대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대선조님이 선계로 떠나고 대사님마저 종적을 감춘 뒤부터 맥이 끊어졌다. 내 도술은 보잘것없다.”

연암대군은 자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은 불꽃을 일으키거나 연기를 피우는 정도이지. 그건 무영도 할 수 있다. 비바람을 부르고, 축지법과 둔갑술을 쓰는 건 전설이 되어 버렸어.”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구슬펐다. 나도 답답하다. 이걸 어떡하나.


모란도 속의 빨간 꽃잎이 달싹거렸다.

‘남쪽으로 가세요. 비단강에서 화공님을 기다리는 이가 있어요.’

“남쪽?”

내가 중얼거리자 연암대군이 바짝 다가왔다.

“남쪽이라 하였느냐?”

“예. 비단강에 가면 실마리를 찾을 겁니다.”


“서두르자. 지금 출발해도 사나흘 뒤에나 닿을 것이다.”

연암대군은 소매를 펄럭이며 뛰어나갔다. 무영도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같이 가요!”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나도 뛰어야 했다. 스산한 복도에 마른 발소리만 쿵쿵 울렸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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