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단서를 찾아

by 록시

말발굽 소리가 따가닥 따가닥 오솔길을 울렸다. 인적 드문 산길에 말 세 마리가 함께 걸으니 소리가 더 컸다. 마른 땅에서 흙먼지도 풀풀 날렸다.

한성을 떠난 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걷는 것보다는 편하지만, 엉덩이가 너무 아팠다. 앉지도,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말이 들썩거릴 때마다 바지에 살이 스쳐서 신음이 나왔다.

처음부터 마차에 탄다고 할 걸 그랬다. 말로 갈 거냐, 수레에 탈 거냐 묻기에 말이 멋져 보여서 ‘당연히 말이죠’, 대답했는데 이럴 줄 몰랐다.

‘그래도 근사해 보이잖아?’

날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이틀 동안 연암대군과 무영과도 조금,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 솔직히 두 사람의 대화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조정 대신들이나 파벌은 내 알 바 아니다. 무영이 나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살아서 돌아가려면.

연암대군은 오늘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

“내일이면 비단강에 닿는다. 정 화공, 누구를 찾으라더냐?”

“그건 말 안 하던데요. 누군가 기다린다고만 했습니다.”


진보전에서 그림들이 서로 나서서 떠들었지만, 딱히 쓸만한 내용은 없었다.

‘호랑이랑 까치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냥. 요괴가 숨겼다옹.’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우린 여섯이 다 모여야만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대사님은 결계를 깰 수 있어요. 왜 이렇게 안 오시죠?’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런데 대사라니? 사람 맞아? 미로도 만들고, 요괴도 잡고, 결계도 깬다면 사람이 아니잖아.


말고삐를 잡아당겨 무영의 옆으로 다가갔다.

“대사님이 누구야? 그림 여섯 장이 다 모이면 대사님의 힘을 지킬 수 있다던데.”

“현덕 대사님 말이냐?”

무영의 말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현덕… 할아버지랑 이름이 똑같다.

“활빈당에서도 최고의 도술사였다. 대선조의 스승이라는 말도 있어.”

“활빈당? 그거 옛날 얘기잖아?”

“그러니까 대사님이지. 대선조께서 선계에 들어가시자 구름을 타고 사라지셨어.”

“아…, 죽었다는 뜻?”

“아니. 선계에 들어가셨다고. 이십 년 전까지만 해도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도와주셨는데 이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현덕 대사님은 대단하구나. 그런 도사와 이름이 같아서 할아버지가 율도국을 좋아하셨나 보다.

연암대군이 말머리를 돌려 다가왔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분을 기다린다. 백룡의 현신이거든.”

“백룡?”

하얀 용, 순간 하얀 붓이 생각났다. 손끝을 가슴에 올리니 붓 통이 만져졌다. 그 안에서 붓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손바닥이 간지러울 정도로.


연암대군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갈색 말이 타닥탁 발을 멈췄다.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야겠다. 산속은 해가 일찍 지니 서두르자.”

“예. 대군마마.”

무영은 말에서 내려 숲길 사이로 앞장섰다. 연암대군도 숲을 둘러보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너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그림 읽는 재주는 어디에서 배웠느냐?”

“그게요….”

이 세계로 날아온 순간, 스킬을 장착했다면 믿으려나. 내가 게임 캐릭터는 아니지만, 확실히 눈도 맑아지고 귀도 밝아졌다. 교실 뒤에 앉으면 칠판이 잘 안 보이는데, 여기서는 온 세상이 또렷하다. 치트 키? 주인공 버프? 뭐라고 대답하지?


스스슥 인기척이 들렸다. 숲속 여기저기서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모여들었다. 딱 봐도 산적들이다. 손에는 칼이니 도끼니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고.

십여 명이 넘는 거구들이 한꺼번에 웃으니, 소리도 기괴했다.

“꼬맹이들이잖아?”

“용감한 녀석들이네. 달랑 셋이 산을 넘는다고? 크하하.”

“얼굴도 반반하니 꽤 받겠는걸.”

산적들은 저마다 무기를 치켜들고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뭐야. 여기서 이렇게 죽는다고? 이럴 수는 없는데.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숨도 안 쉬어진다. 엉덩이에 알이 배어 빨리 도망칠 수도 없다.

연암대군과 무영은 나보다 강했다. 둘이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저녁을 한가로이 보내려 했건만….”

연암대군은 놀라지도 않는다. 그저 아쉬워하는 정도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두 사람 뒤로 물러섰다. 게임이 아니라 진짜 싸움이다. 일단 목숨부터 지키자.

‘난 왜 무기가 없어?’

그림 읽는 재주도 있고, 말도 탈 줄 아는데! 미로 속의 공기도, 바람이 나르는 소식도 알아들으면서 왜 무기는 없냐고. 이래서는 현실의 나와 똑같잖아.


흐압, 고함과 함께 산적들이 뛰어올랐다.

“정 화공! 나무 뒤에 숨거라. 위험하다.”

연암대군이 소리쳤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등줄기가 쭈뼛거렸다. 빨리 피해야 해, 빨리.

돌아서긴 했는데, 땅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풀로 딱 붙인 것 같다.

‘왜 이래? 귀신이라도 있나?’

사람 말고 다른 것도 있나? 맞아. 여긴 율도국이지. 그러고도 남는다. 등골이 오싹했다. 어디… 어디에? 덜덜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산적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연암대군과 무영을 공격했다. 두 사람은 현란한 몸놀림으로 검을 쳐내고 여러 명의 공격을 빠르게 피했다.

어릴 때 무예 도장에서 본 사범님들보다 훨씬, 훨씬 잘한다. 기합 소리가 울릴 때마다 칼이 번쩍였다. 산적들 서너 명은 벌써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쪽에는 이상한 기운이 없다. 빠르게 숲을 둘러보았다.

산적들이 튀어나온 건너편 숲 그늘에서 무언가 꾸물댔다. 크크큭 돌을 긁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길고 검푸른 그림자가 젤리처럼 흐물거렸다.

나무 기둥인 줄 알았는데, 움직인다. 얼굴도 없으면서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젤리 요괴가 내게 물었다.

‘넌 누구냐? 왜 백룡의 기운을 갖고 있지?’


그 소리를 들으니 요괴가 어떻게 나올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놈의 궤적이 왜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시 후, 놈은 젤리처럼 쭈욱 몸을 늘릴 거다. 수십 개의 촉수를 세우고 내게 달려들 테고. 이대로 있으면 뾰족한 촉수에 온몸이 찔려 죽고 말 것이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빨리, 빨리 생각하자. 무기로 쓸만한 것이 없나.”

돌멩이를 던져? 나뭇가지라도 주워들어?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렸다. 그때, 웃옷 속에서 붓 통이 부르르 떨었다.

“백룡의 붓?”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얀 붓이 내 손에 쥐어졌다. 그 순간, 만물상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주문에 맞춰 허공에서 사라진 그림!

그건 종이에 그린 게 아니었다. 그림이니까 당연히 종이라고 착각한 것뿐이다. 할아버지는 허공에 빛으로 그림을 그렸다. 바로 이 붓으로.

‘그려라.’

붓대에 새겨진 백룡이 속삭였다. 다짜고짜 그리라니, 뭘?

건너편 나무 그늘에서 킁킁거리던 요괴가 몸을 쭈욱 늘렸다. 예상한 그대로이다. 긴 꼬챙이처럼 산적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산적들은 젤리 요괴가 자기 몸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싸우느라 정신없다. 연암대군과 무영도 젤리 요괴는 보지도 않았다.


‘내게 다오. 네 피도, 그 붓도.’

젤리 요괴가 몸을 부풀리며 촉수를 늘려갔다. 끝이 화살촉처럼 뾰족해졌다.

저걸 상대하려면 날카로운 발톱이 필요해. 아주 날카로운… 그래, 호랑이를 그리자. 그런데… 어떻게 생겼더라? 모양은 알겠는데 막상 그리려니 생각나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허공에 붓을 휘둘러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렸다. 그 아래 네 개의 다리를 죽죽 그었다.

붓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하얀빛이 선을 만들었다. 작은 동그라미 안에 찢어진 눈과 날카로운 이빨을 그렸다. 크고 뾰족한 발톱도.

“나와라! 호랑이!”


빛으로 그린 그림이 물결처럼 출렁이다가 정체 모를 짐승이 되었다. 몸은 작고 이빨과 발톱만 크다. 이게 뭐람.

“네가 나를 불렀느냐?”

“그래, 저 요괴를 없애줘.”

동그랗고 투명한 짐승이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젖어있어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런가…. 현덕은 올 수 없는 곳으로 갔구나.”

목이 메어 웅얼거리더니 곧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부터 네가 내 주인이다. 호랑이를 불렀느냐.”

괴상한 동그라미가 재주넘듯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거대하고 우람한 호랑이가 되었다. 빛나는 하얀 호랑이.

“크어어엉!”

호랑이가 포효하자 귀가 먹먹해졌다. 젤리 요괴가 수십 가닥의 촉수를 뻗으며 달려들었지만, 그대로 호랑이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꽤애액! 요괴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빛나는 호랑이는 혀로 입을 닦고는 씨익 웃었다.

“다음에는 제대로 그려라.”

인사와 함께 연기처럼 흩어졌다.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크고 멋진 호랑이가 되다니.

‘우와, 대단하데?’

하얀 붓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이게 내 것이라고?

‘은근 괜찮은데? 직접 싸우지 않아도 다 해결되잖아?’

히힛, 웃음이 나왔다. 칼 부딪치는 소리가 뚝 끊겼다. 젤리 요괴가 사라지자마자 산적들이 싸움을 멈췄다.

슬금슬금 풀숲 뒤로 물러났다. 어깨는 축 처지고, 힘이 빠졌는지 비틀거린다. 여태까지 요괴에게 힘을 빌린 모양이다. 아니면, 조종당했거나.

“돌아가자.”

산적들은 나무 뒤로 돌아 숲으로 도망쳐버렸다.


연암대군과 무영은 숨을 헉헉 내쉬면서 천천히 피 묻은 검을 닦았다. 나이는 어려도 역시 대군과 호위무사이다.

“괜찮으냐?”

연암대군이 나를 찾았다. 요괴를 없앴다고 자랑하고 싶지만,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신기한 붓에 대해 알면 빼앗으려 할 테고, 이게 없으면 난 요괴에 잡혀 죽고 말 테니까. 요괴는 붓 말고도 내 피도 원하고 있었다. 내 목숨을 노린다는 뜻이지.

“예. 괜찮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요깃거리를 준비하자.”

연암대군의 말에 무영이 훌쩍 숲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푸드덕 날갯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툭 떨어졌다. 다시 나타난 무영의 손에는 꿩 한 마리가 들려있었다. 까칠하기는 해도 대단한 녀석이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잘 익은 고기를 뜯으니 조금 전의 일이 꿈처럼 아득해졌다. 긴장이 풀어지니 졸음이 몰려왔다. 고개가 자꾸만 끄떡거렸다.

‘아차! 호작도가 어디 있는지 물어볼걸!’

눈을 번쩍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 벌써 아침이었다. 이슬에 젖어 옷이며 담요가 축축해졌다. 연암대군도, 무영도 보이지 않았다. 말 세 마리가 그대로 있는 걸 보면 멀리 가지 않았다. 먹을 것을 찾으러 갔거나 물을 길러 갔겠지.


‘지금이 기회야.’

품에서 붓을 꺼냈다.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휘휘 돌리고, 문지르고 두드려도 그냥 평범한 붓이었다.

“아우! 위험할 때만 나타난다 이거냐?”

편하게 호작도를 찾을 줄 알았는데…. 할 수 없다, 비단강까지 가는 수밖에.

목요일 연재
이전 04화4. 그림 읽는 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