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비단강에서 어느 나루터인지 듣지 못했어도, 잘 찾아왔다. 갈림길마다 나뭇가지에 흰 천이 묶여있었다. 현실 세계에도 등산로마다 빨갛고 노란 리본이 묶여있는 것처럼, 여기도 똑같은 신호 방식이 있나 보다.
강나루에 돛단배 한 척이 매여 있었다. 돛을 내리고 한적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할아버지가 즐겨 그리시던 그림 속 풍경. 꼭 우리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기다렸을 줄이야.
삿갓을 쓴 뱃사공이 우리를 보고는 자갈밭을 뛰어왔다. 아빠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아 보였다. 삿갓 아래로 보이는 회색빛 수염이며 떡 벌어진 어깨가 보통 사람은 아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말인가?”
무영이 경계하며 한 걸음 나서자, 뱃사공 아저씨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예지몽을 꾸었습니다. 귀한 분이 올 테니 준비하라고요.”
“과연. 정 화공이 말한 대로군. 어서 가자.”
연암대군은 놀라지도 않고 당당하게 걸었다. 나와 동갑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위엄 있는 말투에, 칼싸움도 잘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는다. 덕분에 나도 많이 의연해졌지만.
멀리서 볼 때는 작은 배였는데, 사람 네 명과 말 세 마리까지 올라타도 넉넉했다. 뱃사공은 노를 젓느라 말이 없고, 연암대군과 무영은 강 건너편만 바라보았다.
말에 이어 돛단배까지 타보다니 여기 와서 신기한 경험 많이 하네. 나는 돛대도 살피고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이런 배를 어디서 또 타보겠어?
뱃머리에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 해와 달과 별이 있다. 이것도 그림이니 뭔가 알려주려나?
그림을 노려봤지만, 기대와 달리 그림은 조용했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뱃사공이 직접 그렸다는 것뿐이다.
‘강물 위를 다니면 위험하니까 부적이 필요하겠지.’
그래도 대충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영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수증기처럼 꾸물거리는 그림의 기운.
언젠가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저 그런 그림은 있어도, 그냥 그린 그림은 없단다. 선 하나에도 그리는 사람의 감정이 녹아있지. 그린 이의 마음이 어떤지, 어디가 아픈지도 알 수 있지.’
예지몽을 꿀 정도면 그냥 뱃사공은 아닐 거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니 조심해야지. 여기 와서 절실히 깨달았는데, 신기한 일에는 반드시 위험이 따른다. 저기 강가에 솟아오르는 불길처럼.
“어라, 불?”
강 건너 마을에서 시커먼 연기와 함께 새빨간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우리 마을입니다!”
뱃사공이 소리쳤다. 노를 젓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같이 합시다.”
무영이 바닥에 놓인 노를 집어 들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남은 노를 집어 들고 뱃사공의 구호에 맞춰 힘껏 저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초가집은 이미 새까맣게 타고 재만 남았다. 마을 뒤편의 외딴집이라 다른 집에는 피해가 없었다.
“천만다행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입니다.”
다행이라고 말하면서도 뱃사공은 타고 남은 잔해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불을 끄려고 나왔던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혀를 찼다.
“아까워라. 대사님이 머물던 곳인디….”
“귀신이 별짓 다 하는구먼. 좋은 기운 막으려는 게지.”
“워쩌. 흑술사가 판치는데 대사님은 왜 안 오시는 겨?”
사람들은 타버린 집을 보며 현덕 대사를 그리워했다. 한숨에 이어 하소연도 늘어놓았다. 말하기 시합이라도 하듯.
“다른 읍성에서도 난리라매?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진댜.”
“수령님도 꼭두서니라잖여?”
“맘에 안 들면 해코지한다는고만. 끔찍하게 말이여.”
“아이고, 대사님은 한 방에 끝낼 터인디. 언제 오시려나.”
무영의 말로는 현덕 대사가 이십 년 전부터 소식이 없다고 했다.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대사와 만난 적 있을 것이다.
뱃사공 아저씨는 확실히 알 거야. 잿더미 앞에 엄숙하게 서서 묵념할 정도면.
“아저씨, 대사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찌 말로 설명하겠나. 율도국에서 그분 도움을 받지 않은 곳이 없네. 가뭄과 홍수가 있을 때마다 도와주셨지. 요괴도 소멸시키고, 탐관오리도 혼내주고.”
뱃사공은 한참 동안 불탄 집을 바라보다가 연암대군 앞에 섰다.
“이만 가시지요. 집이 누추하나 손님들이 묵을 방은 있습니다.”
“여기선 우리가 할 일이 없구나. 내려가자.”
연암대군이 내게도 손짓했다. 나도 따라가려는데 어디선가 사사삭 소리가 들렸다. 타다가 무너진 초가집 잔해에서.
“마마,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무슨 소리 말인가?”
연암대군과 무영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것도 내게만 들리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찾아줘야지.
“잠시만 살펴보고 내려가겠습니다.”
“멀리 가지는 마라. 짐을 풀고 무영을 보내마.”
뱃사공의 집이 어딘지도 알아야 하고, 타고 온 말도 돌봐야 한다. 연암대군과 무영은 사람들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이런 건 혼자 조용히 살펴보는 편이 훨씬 낫다. 뭔지 몰라도 다른 사람이 알면 시끄러워질 테니까. 곧장 집 뒤편으로 돌아갔다.
타다 만 흙벽 속에서 신호가 들렸다. 무너진 흙벽을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긁어낸 흔적이 남았다. 불을 지르기 전에 범인이 이 집을 뒤졌어.
‘이 안에서 나는 소리인데….’
막대기를 찾아 흙벽을 두드렸다. 흙이 덩어리져 떨어지더니 잠시 후 와르르 무너졌다.
방바닥과 기둥이 맞닿는 벽 속에 누런 두루마리가 끼어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그림 한 장이었다.
‘이건….’
할아버지가 나를 그린 그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기억이 또렷하다. 그림 속의 내가 들고 있는 까마귀 인형 때문이다.
방학이었는지, 학교 공사 때문이었는지 그날 난 할아버지 가게에 있었다. 만물상 바닥을 쓸고 있는데, 이상한 손님이 들어왔다. 두루마기를 입고 갓도 쓰고 말이다. 할아버지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데도 반말로 인사해 놀라웠다.
‘잘 지냈나?’
‘어쩐 일이십니까?’
할아버지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상한 옷차림에 이상한 말투, 그럼에도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 모두 신기했다.
‘자네도 곧 올라온다지. 얼굴이나 볼까 하여 왔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상한 선비가 가게 안을 돌아보더니 나를 알아보았다.
‘이 아이인가?’
‘예. 정지민이라 합니다.’
할아버지가 이름을 말하자, 선비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좋은 이름이구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넓은 소맷자락에서 작은 까마귀 인형을 꺼냈다.
‘부탁을 맨입으로 할 수는 없지. 자, 선물이다.’
나는 얼떨결에 인형을 받았다. 열쇠고리에 매다는 작은 인형이었다. 인형을 보고 있는 사이 이상한 손님은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그림도, 인형도 그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림이 여기 있다는 건….
‘할아버지가 현덕 대사? 그래도 이상한데?’
내가 6학년 때면, 이 그림은 사 년 전에 그렸다. 현덕 대사는 이십 년 전부터 안 나타났잖아? 시간이 안 맞는다.
그림을 들고 있으니 먹 선이 꾸물거렸다. 그림 선이 일그러지며 서서히 글자로 바뀌었다. 그림으 편지가 되었다.
‘지민아, 네가 누구인지 알았겠구나. 율도국을 지켜다오. 멈추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 너만의 방식으로.’
이게 무슨 말이야?
바람이 휙 불어왔다. 잿더미 속 타다 만 나무토막들이 투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종이 위의 글자도 바람을 따라 펄럭이더니 공기 속으로 흩어져버렸다. 누렇게 바란 빈 종이만 남았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그림 읽는 화공, 아니면 흰 붓의 주인? 그게 답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상한 것투성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올 줄 어떻게 알고 그림을 숨겨놓았을까? 의문은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나를 자주 그리셨지만, 그림을 보지는 못했다. 율도국 여기저기에 흩어놓으셨나. 아마도 현덕 대사가 다녀갔거나 머물던 곳? 오늘 찾은 그림은 내가 풀어야 할 첫 번째 숙제일 뿐이고.
‘넌 좋은 눈을 갖고 있단다. 그 눈이 다른 것을 보여줄 거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시력이 좋다는 뜻인 줄 알았다. 다른 것은 독특한 그림을 잘 그린다는 뜻인가 싶었는데, 율도국을 보고, 요괴를 보는 눈이었어?
누런 종이를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가 할 일은 알겠다. 흑술사를 없애고, 여섯 번째 그림을 찾는 일. 이번 일을 끝내도 다시 와서, 이상한 선비의 부탁을 지켜야 한다는 것까지.
쪼그리고 있으니 탄내가 심하게 밀려왔다. 기름 냄새 속에 향 비슷한 냄새도 섞여 있었다. 불을 지르려고 기름을 부었을 테니 기름은 그렇다 쳐도 향은 어울리지 않았다. 향내의 원인을 찾아 잿더미가 된 집을 한 바퀴 돌았다.
“뭐 하고 있어?”
무영이 내 등을 찰싹 두드렸다. 깜짝 놀라 우왓! 소리를 질렀다.
“겁쟁이! 왜 그렇게 놀라?”
“여기 향냄새가 나지 않아?”
무영이 코를 킁킁거렸다. 이리저리 냄새를 맡더니 마루 밑 디딤돌 뒤쪽을 가리켰다.
“여기다.”
무영은 손을 뻗어 부러진 향 다발과 노란 부적을 꺼냈다. 노란 종이에 붉은 물감으로 글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기호를 그려놓았다.
“부적이군.”
“무슨 부적인데?”
“그건 모르지. 하지만, 사람들의 얘기대로라면…. 대사님의 기운을 끌어모으려 했을 거다. 읍성마다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흑술사가 요괴를 부리기 때문이다.”
“여기는 경찰…이 아니고 수령 없어? 관찰사나 뭐 그런 거.”
“맨정신이면 가만있을 리 없지. 요괴의 최면술에 당했을 거다.”
율도국 사람들은 요괴의 존재를 알지만 보지는 못한다. 산적들도 젤리 요괴를 전혀 못 느꼈으니까. 그렇다면 볼 줄 아는 사람이 놈을 상대해야지. 흙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흑술사를 없애고 요괴를 소멸시켜야겠어.”
“네가?”
무영이 입을 비쭉거렸다. 무시하는 눈빛이 꼭 그 녀석들 같다. 미술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았을 때, 떼 지어 몰려와서 노려보던 녀석들.
‘네까짓 게? 뒤에서 뭔 짓 했지?’
대장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나를 죄인 취급하면서. 중학교 3년 내내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었는데…. 녀석들의 눈빛이 딱 지금의 무영과 같았다.
어쨌든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그 녀석들은 내가 버렸고, 여기에서의 난 보통 사람이 아니다.
“못 할 것 없어. 아무리 흑주술을 쓴대도 날 못 이겨.”
가슴에 손을 얹었다. 품 안의 붓 통이 만져졌다. 백룡의 붓, 그것만 있으면 된다.
무영이 코웃음쳤다.
“헛! 그림 읽는 재주로 상대할 일이 아니야. 요괴에 사병까지 부릴 거다. 넌 도적 한 명도 상대하지 못하잖아.”
“뭐라고? 그때 난 요괴를….”
그만두자. 설명하기 귀찮다. 어차피 언젠가는 무영도, 연암대군도 알게 될 거다.
‘내가 바로 현덕 대사님의 후계자라고!’
엉킨 매듭은 풀어지려 한다잖아. 사건을 만나야 실력을 쌓지, 안전한 길로만 다니면 어떻게 레벨을 올려? 그래도 무영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림만 찾으면 해결된다. 대군마마의 안전이 우선이야.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가실 분이다.”
진보전에 걸린 다섯 장의 그림이 차례로 떠올랐다. 여섯 장이 다 모이면 대사님의 기운이 이 땅을 지킬 거라고. 그래서 요괴들이 그림을 훔친 것이다.
그림 속 모란이 비단강으로 가라고 했으니, 내가 할 일이 여기에 있다. 흑술사부터 처리해야지. 그러면 여섯 번째 그림도 나타날 거야.
“혼자서라도 갈 거야. 이게 첫 번째 시험이거든.”
“뭔 소리야?”
무영이 투덜거렸다. 설명해도 믿지 못할 거면서.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뱃사공 아저씨는 알고 있을 거야. 배에 그려놓은 문양, 거기서 나오는 기운도 남달랐으니까.
팔을 휘휘 내저을 때마다 소매 속 종이가 부스럭거렸다. 누렇게 바랬지만, 할아버지가 남긴 소중한 물건이다. 잘 간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