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첫 번째 시험

by 록시


‘헉!’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둡고 좁은 방, 퀘퀘한 흙냄새, 미지근한 방바닥. 여긴 어디지? 이번에도 꿈인가? 실눈을 뜨고 방을 둘러보았다. 꿈이 아니다.

‘아, 율도국으로 들어왔지.’

창호지가 바람에 들썩거렸다. 담장을 둘러싼 대나무들이 사각대고, 가끔 부엉이도 부웅부웅 울어댔다. 한밤중이지만, 달빛이 밝아 옆에 누운 사람이 잘 보였다.

연암대군과 무영이 팔다리를 대자로 뻗은 채 코를 골고 있다. 나는 무영의 억센 팔에 눌려 잠이 깬 것이다.

‘목 졸려 죽는 줄 알았네.’

벽에 기대앉아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나 정리해 보자.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흑술사는 신기한 힘을 갖고 있다. 십여 년 전에 갑자기 나타나서 원래 있던 백 도사를 쫓아내고 읍성의 공식 술사가 되었다.

백 도사와 같은 스승에게 배웠다는 소문도 있고, 요괴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소문도 있다.

요괴도 부린다는데, 실제로 요괴를 본 사람은 없다. 그래도 기괴한 소리가 들리고 차갑고 축축한 것이 목을 조르는 것 같다고 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 때문에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한다.

그뿐이 아니다. 신당의 석상들이 흑술사를 지키고 있어서 잘못 들어가면 혼쭐이 난다. 석상이 쿵쿵 움직이고, 나무토막이 살아서 날아다닌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웅웅 소리가 들리는데 저승에서 부르는 소리 같다나.


‘그걸 믿는다고? 연극할 때 쓰는 무대 장치랑 비슷하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속임수 같다. 영화에서도 많이 봤다. 최면술과 몇 가지 장치로 할 수 있다.

요괴를 부린다지만, 요괴가 사람 말을 따를 리가 없잖아. 악마가 아무 대가 없이 움직이는 거 봤어? 흑술사가 요괴에게 이용당하는 거겠지.

여기서 이틀만 걸으면 읍성 감영이다. 흑술사의 속임수를 파헤치고, 진실을 알려야지.

‘어라? 나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는데?’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아니, 아직 하지는 않았지만, 생각한 것만도 놀랍다. 학교에서는 겁쟁이였는데, 이렇게 용감해지다니….

백룡의 붓 덕분인가. 그래, 이건 내가 아니면 안 되잖아? 이유야 어떻든, 현실에서보다 율도국에서의 내가 더 마음에 든다.


머리맡에 놓아둔 누런 종이를 집어 들었다. 소매에 넣고 다녔더니 꼬깃거린다. 달빛에 비춰보니 구겨진 선이 도드라졌다. 다리미가 없으니 손바닥으로라도 눌러야지.

온기로 구김을 펴는데, 무영의 검은 옷깃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작은 점이 톡 부어올랐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까만 점은 금방 물방울처럼 부풀었다. 꾸물거리다가 작고 검은 새가 되었다.

“까… 마귀?”

내가 받았던 까마귀 인형과 똑같다. 할아버지 가게에서 신기한 손님이 주고 간. 그림 속에 있던 그 까마귀. 가만, 종이만 남고 그림은 날아갔잖아? 그… 그 까마귀가 이 까마귀?


‘캬캬캬. 기억하는구나. 어리버리 애송아.’

“무영의 옷에 숨어있었어?”

‘숨다니! 기다린 거다. 캬캬.’

까마귀는 무영의 가슴으로 내려앉더니 폴짝거렸다.

‘네가 후계자? 카아, 그런데 영….’

날개를 퍼덕이며 방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한숨을 내쉬고는 내 주위를 돌았다.

‘믿음이 안 가는구나. 철부지 겁쟁이에, 무예도 못 하고. 자기 재주가 뭔지도 모르니. 카아.’

“그림을 읽을 수 있어. 그림이 말한다니까.”

‘캬캬. 백중에 하나 찾아내고 자랑이냐?’


이 까마귀가 은근히 성질을 돋우네. 대놓고 재수 없는 소리를 해? 주먹만 한 것이 뻐기는 꼴이 우습다.

‘꼬맹아, 이 몸이 배가 고프다. 널 기다리느라 먹지도 못하고 뼈만 남았다.’

어이가 없네. 동글동글한 몸통이 몽땅 순살인데 무슨. 그래도 처음 보는 영물이라 꾹 참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먹을 거 없어. 부엌에 가봐.”

‘나더러 사람의 음식을 먹으라는 거냐?’

“그럼 나가서 사냥하든지.”

‘꺄각, 너한테 붓과 종이가 있잖아.’

“설마 종이를 먹으려고?”

‘멍청아! 그리면 되잖아. 맛난 거로 그려라.’

오호, 까마귀가 말버릇은 나빠도 비술을 가르쳐주는구나.


백룡의 붓과 구겨진 종이를 꺼내 들었다. 마른 붓으로 슥슥 쌀알을 그렸다. 먹물이 없는데도 붓이 지나간 자국이 보인다. 쌀알을 몇 개 더 그렸다.

‘퉤! 고기 없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소고기 말이야.’

윤기는 모르겠고, 뼈에 붙은 고깃덩어리를 그렸다. 만화에서 자주 봐서 그리기 쉽다. 모양도 간단하고.

까마귀가 캬악 웃으며 날개를 활짝 폈다. 마음에 드나 보다. 부리로 종이를 톡톡 건드리니, 그림 속 고깃덩어리가 밖으로 툭 떨어졌다. 누런 종이는 흔적 없이 깨끗해졌다. 놀랍다!

“우와!”

‘캬캬, 풋내기.’

까마귀는 제 머리보다 큰 고깃덩어리를 한입에 꿀꺽 삼켰다.

‘이제 알겠냐?’


이 붓과 종이만 있으면 난 천하무적이다. 위험할 때는 허공에 호랑이를 그리고, 배고플 때는 종이에 음식을 그리면 된다. 호랑이와 음식 뿐인가?

나를 위한 군대도 그릴 수 있다. 게임에 나오는 전사라면 금방 그린다. 왕궁 기사부터 몬스터까지, 바위 인간에 해골 병사도 거뜬하다.

그뿐인가! 도깨비와 사대천왕까지 몽땅 그릴 수 있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베꼈는데.

‘창과 활을 그려서 무기로 써야지.’

나도 연암대군과 무영처럼 싸우는 거야. 신이 나서 킬킬거리는데 까마귀가 고개를 젖히고 괴상하게 웃어댔다.

‘어리버리 멍청이! 싸울 줄도 모르면서 칼만 쥐면 될 성싶냐?’

까마귀는 꺅꺅거리며 바닥을 탕탕 뛰었다. 화가 났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난 싸움도 싫어하고, 싸울 줄도 모른다.


‘무영이 가르쳐줄 거다. 네 몸은 네가 지켜. 네 그림은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거든. 그래도 뭐….’

까마귀는 누워있는 무영의 배 위로 뛰어올랐다. 무영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코까지 골면서.

‘너라면 며칠 만에 배울 거다. 이쪽과 저쪽 세계를 동시에 사는 사람이니까. 풋!’

까마귀는 무영의 검은 옷깃으로 스며들었다. 마지막까지 비웃듯 부리를 푸르르 떨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얄미우면서도 고마웠다.


이쪽과 저쪽 세계를 동시에. 저쪽은 현실 세계일 테고. 이쪽은 율도국. 현실의 내가 어떤지는 나도 잘 안다.

그래도 여기는 다르다. 이쪽 세계에서 내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백 가지 중의 하나만 안다고? 다른 것도 찾아야겠어. 먼저 검술부터 배우고, 요괴와 상대할 전술도 고민해야지.

‘나의 군사? 하하, 멋진데?’

날이 밝기만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무거운 눈꺼풀을 버티다가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야, 일어나!”

무영의 발길질에 눈을 떴다. 그사이를 못 참고 잠이 들었나.

“흑술사를 없애겠다며? 이리 게을러서 요괴 발끝이라도 볼 수 있겠나!”

“아우, 새벽까지 깨어있었단 말이야.”

“아침 먹기 전에 일 초식을 완성한다. 빨리 나와.”

까마귀가 말한 대로 하룻밤 사이에 무영이 달라졌다. 날 가르치려고 열심이다. 그래도 아침부터 수련하려니 죽을 맛이다. 첫 번째 시험이고 뭐고 그냥 자고 싶다.


무영이 내 발치에 긴 막대기를 던졌다. 이제 시작인가. 어릴 때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택견 도장과 무예 학원에 다닌 적 있다. 그때는 몹시 싫었는데, 날 끌고 다니신 이유가 있었구나.

그때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면 된다. 잘 배워놓으면 학교에서 어슬렁거리는 덩치들도 무섭지 않겠다. 혹시 날 괴롭히면 쓴맛을 보여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팔뚝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얍! 무턱대고 막대기를 휘두르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무영은 코웃음 치면서도 내 자세를 고쳐주었다. 조금 고마운데?


아침부터 땀을 한가득 흘렸더니 밥맛이 꿀맛이다. 정신없이 입으로 밥을 퍼넣었다. 까칠한 보리밥에 된장국, 깍두기와 간장이 전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나와는 달리 연암대군은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백성을 괴롭히는 무리를 어찌 보고만 있겠나. 내가 처리하겠다.”

“위험합니다. 귀한 분이 나설 일이 아닙니다.”

뱃사공 아저씨기 숭늉을 내밀었다. 연암대군은 숭늉 한 그릇도 우아하게 받아마셨다. 역시 왕자의 위엄이 느껴진다.


대군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지. 장차 율도국의 왕이 될 텐데. 여기서는 내가 나서야겠다.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연암대군과 무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흑술사는 제가 상대할 테니, 수령은 두 분이 처리하십시오.”

“너 머리가 어떻게 됐냐?”

무영이 손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키고는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지금은 녀석과 싸울 때가 아니다. 새벽에 이미 시나리오를 짰단 말이지.


“뱃사공 아저씨한테도 부탁할게요.”

아저씨도 눈을 크게 떴다. 세 사람의 시선이 모이니 쿠쿵 심장이 요동쳤지만, 떨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밤새 고민한 내 계획을 설명했다.

첫째, 모두가 현덕 대사를 기다리니,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사람들은 희망과 용기를 얻고, 요괴는 불안해할 것이다.

둘째, 흑술사는 속임수를 쓰고 있다.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 궁지에 몰리면 요괴를 부를 테니 그때 내가 요괴를 처리하겠다.

셋째, 수령이 최면에 당했다면 흑술사를 지키려 할 것이다. 연암대군과 무영이 병사들을 상대한다.

넷째, 잃어버린 그림에 대한 단서도 여기 있을 것이다. 그것도 함께 찾겠다.


“어때요? 괜찮죠?”

할 말을 다 했는데도 세 사람은 대답이 없다. 눈만 껌뻑거린다. 뱃사공 아저씨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대사님 후계자가 정말 계신가?”

“어, 그건….”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야. 율도국은 처음이라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젤리 요괴 말고 다른 요괴는 보지도 못했다.

백룡의 붓도 한 번밖에 써보지 않았고, 나한테 백 가지 재주가 있다고 했지만 뭔지 모른다. 섣불리 나섰다가 잘못되면 오히려 다른 사람이 위험해진다.

“일종의 함정이죠. 요괴는 대사님을 두려워하니까요.”

세 사람은 믿을 듯 말 듯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연암대군이 팔짱을 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흑술사는 동요하겠지만…, 헛소문이 드러나면 어찌하려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네 재주로 세상의 기운도 읽나 보구나.”

연암대군이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의심하면서도 나를 믿는 눈치였다.


“요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는 적과 어떻게 싸울 텐가?”

“제가 그림 읽는 재주가 있지 않습니까? 요괴도 보입니다. 며칠 전 산적을 끌고 온 것이 젤리 요괴였습니다.”

“요괴를 만났다고?”

무영이 버럭 소리치고는 곧 눈을 찌푸렸다.

“젤… 뭐?”

일일이 설명한 시간이 없다. 첫 번째 시험은 벌써 시작되었다. 마음이 급하다. 뱃사공 아저씨의 소매를 흔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소문부터 퍼뜨려야죠.”

“아침 일찍 장터로 떠나는 무리가 있네. 그편에 먼저 소식을 보내고, 우리도 바로 출발하세.”

“아저씨도 가려고요?”

“당연하지. 내 손으로 끝장내겠네.”

뱃사공 아저씨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마나 힘을 주는지 목소리가 까칠하게 갈라졌다.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아저씨가 같이 간다면야 나도 좋다.

드디어 백룡의 붓을 쓸 기회가 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불러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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