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출발했지만, 성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머리 꼭대기까지 떠올랐다. 산길에서 내려오자마자 달구지를 끌던 말이 갑자기 멈추더니, 고집을 부렸다. 꼼짝도 안 하는 말을 달래느라 늦어졌다.
오월 날씨치고는 꽤 덥다. 선발대는 이미 저잣거리에 자리를 잡고 난전을 폈을 것이다.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성문 앞에는 이십여 명의 군졸들이 드나드는 사람들을 한 명씩 검사하고 있었다.
“소문 참 빠르네.”
무영이 검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기세이다.
“그럴수록 우리에게 유리해. 흑술사와 요괴가 긴장할 테니까.”
사람은 다급하면 허점을 보이거든. 영화에서 많이 봤다. 들어가는 행렬 끝에 서서 성문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품속에는 백룡의 붓이 있고, 만약을 대비해 누런 종이에 십이지 신장도 그려놓았다. 무영에게 단검도 선물 받았다. 아직은 검술이 서툴지만 도움이 될 것이다.
“거참, 무슨 일 났소? 왜들 그러쇼?”
앞쪽에서 누군가 투덜댔지만, 군졸들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남자들만 자세히 검사하고, 노인과 아이, 여인은 대충 들여보냈다.
아무래도 현덕 대사의 후계자가 나이 지긋한 어른이라고 정했나 보다. 들키지 않으려고 하인으로 분장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뱃사공 아저씨는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삿갓을 쓰고 검은 지팡이까지 짚었으니 영락없는 도사 차림이다. 지휘관까지 나와서 묻고 또 물었다.
“어디 사는 누구라고?”
“비단강 뱃사공이라니까 그러십니다.”
호패를 보여줘도 보내주지 않았다. 다행히 아저씨를 아는 군졸이 있어서 간신히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안은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했다. 명절도 아닌데 한껏 들떠있다. 얼마나 북적대는지, 성 안팎에 사는 주민들이 모두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작은북을 두드리고 방울을 흔들며 뛰어다녔다. 흑술사가 괴롭힌다는 소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상하구먼. 여기가 이런 곳이 아닌데….”
뱃사공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헛기침했다.
“꼭 잔칫날 같습니다요.”
뱃사공 아저씨와 연암대군은 뒷짐을 지고 아이들과 저잣거리를 돌아다녔다. 작전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너무 여유롭다. 뒤에서 나만 발을 동동 굴렀다.
그사이 무영은 관아와 신당의 위치를 알아 왔다. 어딜 가나 재빠르고 부지런한 녀석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썩 어울린다.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오늘 대사님의 후계자가 온다고 모두 들떠 있습니다.”
“오늘? 그런 말은 안 했는데?”
뱃사공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연암대군은 알고 있었다는 듯 끄덕였다.
“그래서 검문이 심했구나. 가서 얘기나 들어보자.”
일부러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저잣거리의 행인들은 온통 현덕 대사 이야기였다.
“오늘 신당에 나타난다며?”
“무슨! 관아 한가운데로 날아오시겠지. 이제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다네.”
“안심하기는 일러. 성안의 군졸들이 싹 불려 갔으니까.”
이상하다.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했지, 여기로, 그것도 오늘 온다고는 안 했는데, 어디서 잘못된 걸까. 이러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싸워야 하잖아?
지나가는 장사꾼들을 눈으로 좇으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맞은편 지붕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히죽거렸다. 무영의 옷자락에 숨어있던 그 까마귀였다.
‘꼬맹아, 이게 다 내 덕이니라.’
“이, 이….”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으니, 욕할 수도 없었다.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데 무영이 내 어깨를 쳤다.
“뭐 해? 빨리 움직여.”
무영은 행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앞장섰다.
“다들 신당으로, 관아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가자. 수령을 직접 만나야겠다. 우리는 관아로 가자.”
오면서 약속한 대로 연암대군과 무영은 관아로, 나와 뱃사공은 흑술사의 신당이 있는 북문으로 향했다.
흑술사의 신당은 북문으로 이어지는 언덕 위에 있었다. 오솔길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가고 있어 쉽게 찾았다.
장터에서 일을 끝내고 오는 지게꾼도 있고, 봇짐을 동여맨 남자와 보따리를 든 여자도 있었다. 큰 소쿠리를 짊어진 남자가 앞서가는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해야지! 흑술사에게 찍히면 큰일이여.”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려, 행여나 저주라도 받으면 워쩌?”
“뭐가 문제인가. 수호자가 돌아왔으니 만사형통일세.”
흑술사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사의 후계자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언덕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십여 명의 무리가 언덕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구경꾼은 많을수록 좋다. 흑술사의 속임수를 알아내면 여기저기 소문내 줄 테니까.
“후계자는 분명 여기로 올 거여. 백 도사가 지내던 곳이니께. 대사님과 친하지 않았나.”
“그러게. 억울하게 누명 썼는디, 증거가 없으니….”
“살아는 있으려나.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디.”
혀를 쯧쯧 차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나야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지만.
사람들을 따라 걸으면서 오솔길을 둘러보았다. 아름드리나무가 가로수처럼 길 양편으로 늘어서 있었다. 가지마다 잎이 무성하고 넝쿨도 빼곡히 자라 하늘을 가렸다. 한낮인데도 어둡고 축축했다.
“예전에는 밝고 따뜻했건만….”
뱃사공 아저씨가 지팡이로 흙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오르막이라 숨이 가빴다.
언덕 꼭대기, 신당 가까이 다가가자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 같지만 바람이 아니었다. 물결이 일렁이듯 공기가 일렁거렸다. 요괴의 기운도 느껴졌다. 이걸 알아차리다니! 나 자신이 신기하다.
‘기다리던 놈들인가.’
그러나 요괴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신당 앞에 나란히 선 석상이 우르르 흔들렸다. 석상이 움직일 때마다 옅은 향냄새도 함께 풍겼다. 어디서 맡아본 냄새인데…. 타버린 초가에 남아있던 그 향이다.
머리 위, 나무 사이로 사천왕 그림이 펄럭이며 길을 가로막았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요괴여, 요괴! 아이고.”
“흑술사가 요괴를 불렀다!”
한꺼번에 뒤로 물러서니 좁은 길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메고 있던 봇짐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누군가는 보따리를 놓쳐버렸다.
“으악, 내 그릇!”
자루에 담겼던 콩알이 촤르르륵 구르고, 떨어진 연적이 파삭 소리와 함께 깨졌다. 인파에 밀려 서 있기도 힘들었다. 똑바로 서기 위해 발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떴다.
대시조 홍길동이 도술을 썼기 때문에 율도국 사람들은 도술을 쉽게 믿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 속임수가 틀림없다. 우선 이 어둠침침하고 스산한 숲길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건 최면을 걸기 딱 좋은 분위기니까.
언젠가 책에서 읽었다. 최면을 쉽게 거는 방법.
일단 어두워야 한다. 어슴푸레한 빛이 좋단다. 숲속이라 햇빛이 들지 않는 이 길이 그렇다. 다음은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옷. 아마 흑술사의 옷도 빨갛고 노랗고 현란할 것이다.
시각과 후각, 청각도 자극해야 한다. 향에서 나오는 냄새가 그것이다. 소리도 시끄러워야 한다.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 북과 장구가 요란하게 장단을 맞춘다면 딱 들어맞는다.
내 추측을 증명하듯 신당에서는 꽹과리와 장구가 박자에 맞춰 두둥 째쟁거렸다. 진짜 요괴가 나타났다면 붓이 신호를 보낼 텐데, 웃옷 속의 붓은 조용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들었다. 율도국의 요괴 이야기.
‘요괴는 사람을 이용하지, 도와주지 않는다. 먹이로 여기거든. 처음에는 사람이 요괴를 키우지만, 나중에는 그 요괴의 힘을 빌리기 위해 앞잡이가 된단다.’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가 바로 율도국 매뉴얼이었구나. 그걸 지금 깨닫다니. 그때 잘 기억해 둘걸. 아… 후회는 나중에. 지금은 지금의 일을 해야지.
석상의 움직임은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진짜 요괴의 소행이라면 사람처럼 움직일 텐데 앞뒤로 끄덕거렸다.
구경꾼들 틈에 숨어 몸을 최대한 낮추었다. 살금살금 석상 가까이 다가갔다. 석상 뒤쪽 바닥에 굵은 밧줄이 보였다. 땅 밑으로 이어져 있다. 줄 끝이 어딘가로 이어져 있을 거야.
‘여기서 줄을 움직일 만한 거리는….’
한쪽은 길 건너편 나무 아래, 한쪽은 신당으로 들어가는 쪽문 앞이다. 누군가 숨어서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구나.
뱃사공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쳤다.
“속지 마시오! 도술은 사람을 위해 쓰는 겁니다!”
“저 그림 안 보이오? 저절로 움직이잖소?”
“속임수입니다. 진짜 도사는 이런 저속한 수법은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흑술사가 저주를 퍼부을 거라 걱정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 그림이 펄럭이자 뱃사공 아저씨의 외침은 비명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밀려다니는 바람에 혼자 비틀거렸다.
여기서 시간을 버릴 수는 없어. 마음이 급해졌다.
‘속임수부터 밝히자. 진짜 요괴를 부르도록 궁지에 몰아넣어야지.’
요괴가 없어지면 수령과 군졸도 정신을 차릴 테고, 연암대군과 무영의 일도 쉽게 끝날 것이다.
숨겨온 단검을 꺼냈다. 밧줄을 자르자, 석상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어라? 멈췄어.”
“저주가 풀렸나?”
아직도 눈치 못 채다니. 그림이 어떻게 혼자 팔락거리겠어. 당연히 매달려있잖아! 믿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다. 저러니 사기꾼에게 당하지.
오솔길은 숲이 우거져 어두운 데다 나무 사이 무시무시한 장승도 줄지어 서 있다. 마법진 같은 해괴한 문양도 많다. 그런 걸 보느라 다른 건 보지 못한다.
사천왕 그림 옆으로 가느다란 실이 보였다. 그냥은 안 보이고, 햇빛을 받는 위치를 잘 찾아야 보였다. 하얀 실은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이어진다.
양옆의 나뭇가지 사이에 도르래가 붙어있다. 생각할 것도 없다. 무작정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내가 나무를 탄다고? 현실 세계에서는 엄두도 못 내지만, 여기서는 몸이 가볍게 움직였다.
도르래에 나무토막을 끼워 넣었다. 털컥 도르래가 멈추고, 그림도 멈추었다. 대신 끼기긱 쇳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림이 멈추었네.”
누군가 말하자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들키면 안 돼.’
나무 뒤로 몸을 숨기느라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나뭇가지에 발을 걸쳤다.
“뭐여? 쇳조각? 저게 움직인 거여?”
“우리를 속였어!”
“이, 이 사기꾼!”
시끄럽게 울리던 꽹과리와 장구가 딱 멈추었다. 나무 위에서 보니 담장 뒤로 도망치는 하인들이 보였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구나!”
신당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흑술사가 나왔는데, 예상대로였다. 붉은 바지저고리에 노란 반비를 걸쳐 입고 장식이 많이 달린 지팡이를 들었다. 머리에 쓴 모자도 알록달록 화려하다.
“용서하지 않겠다!”
흑술사가 지팡이를 흔들었다. 하늘이 쿠쿠쿵 울리며 땅이 흔들렸다.
“봐라, 내 힘을!”
신당 뒤편에서 구름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먹물을 쏟은 것처럼 새까만 구름이 몰려왔다.
‘나왔다. 요괴들!’
구름 속에 요괴들이 숨어있지만, 사람에게는 요괴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번개가 파지직거리며 땅에 꽂혔다.
“아이고! 술사님!”
사람들은 두 팔을 올리고는 바짝 엎드렸다. 파도타기 하듯 앞에서 뒤로 손이 출렁거렸다. 엎드린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지금이다. 나무에서 내려와 뱃사공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제가 요괴를 상대할 테니 흑술사를 막아주세요.”
“네가? 저 요괴들을?”
“벌써 열, 아니 열세 마리나 기어 나왔어요! 빨리요.”
“저 요괴가 보이냐? 너… 설마….”
뱃사공 아저씨와 얘기할 시간이 없다. 요괴가 열셋이나 된다! 내가 준비한 그림은 십이지 신장, 열두 명이라고.
누런 종이를 손에 쥐고 뛰어나갔다. 신장을 깨우려면 요괴가 일으키는 바람이 필요하다. 구름의 기운이 흐르는 곳까지 다가갔다.
종이가 몇 번 출렁거리더니 창과 칼을 든 열두 명의 신장이 튀어나왔다. 검은 먹으로 그린 작은 신장은 땅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거대한 장수로 바뀌었다.
“가라! 요괴를 없애!”
“예! 주인님!”
열두 명의 신장은 땅을 박차고 훅 튀어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마리씩 요괴와 맞붙어 싸웠다.
크아앙! 챙캉!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칼이 부딪치는 섬광은 번개처럼, 기합과 비명은 천둥처럼 들렸다.
남은 한 마리가 스멀스멀 내게로 다가왔다.
‘백룡이구나. 왜 그걸 네가 갖고 있지?’
요괴에게 답할 마음은 없다. 재빨리 붓을 꺼냈다. 하얀 옥돌 붓대가 따뜻하다.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그려야지. 동그라미 두 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백호를 그려주마.
머릿속에 영물 백호의 이미지를 또렷이 그렸다.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붓끝에서 빛이 나오며 허공에 거대한 호랑이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