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와앙!
거대한 호랑이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주변의 공기가 폭발하듯 거세게 일렁였다. 젤리 요괴 때와 싸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빠르고 강하다.
하얀 호랑이가 허공을 가르며 훌쩍 뛰어올랐다.
‘히익!’
나를 노려보던 요괴가 스르륵 몸을 감추었지만, 호랑이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요괴를 집어 삼켰다.
요괴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라졌다. 내가 그린 그림인데… 이렇게나 강하다고?
‘나는 네 기운으로 움직이니까.’
호랑이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거 맞지? 그럼, 십이지 신장도 호랑이처럼 요괴를 삼키겠지?
그러나, 신장들은 창과 칼로 요괴의 공격을 막고만 있을 뿐 삼키지 않는다. 빨리 삼키라고! 빨리!
발을 구르고 있을 때, 작은 까마귀가 귓가에서 까아악거렸다.
‘꺄꺄꺄. 바보냐? 구슬이 있어야지.’
“구슬?”
‘멍청아, 네가 갖고 놀던 구슬! 그걸 소환해.’
구슬…? 뭔지 알겠다. 할아버지의 만물상에서 보았어. 야구공만 한 유리구슬 속에 별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렸지. 너무 예뻐서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잠깐, 그 안에 든 게 별이 아니라 사로잡은 요괴였어?
‘그거 창고에 있는데? 어떻게 가져와?’
언제 집에까지 갔다가 돌아오냐고. 아직 창고에 남아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요괴가 네 그림까지 먹어버리기 전에! 그럼, 네 힘을 빨아들여 요괴가 더 세진다고.’
까마귀는 머리를 쳐들고 까르륵거렸다. 손뼉 치듯 날개를 파닥이면서. 도와줄 거면 그냥 도우면 안 돼? 왜 속을 긁어?
그나저나 소환하라니…. 에라, 모르겠다.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뻗었다. 이러면 되는 건가.
“나와라, 구슬!”
떨려서 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다시 외쳤지만, 아무 변화가 없다.
신당 아래 넓은 마당이 전쟁터였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십이지 신장과 요괴가 여기저기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다. 하얀 호랑이는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지켜본다. 시험 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구슬아, 빨리 나와라. 빨리.
“요괴 잡는 구슬! 내게 와라! 지금 당장!”
손바닥에서 파지직 빛이 나더니 공간이 갈라졌다. 주문이 맞았구나. 간절한 마음이 통했나. 아무튼.
눈 깜짝할 사이, 구슬이 내 손 위에 얹어졌다. 어릴 때 그대로였다. 야구공 크기의 투명하고 푸른 구슬 속에 수많은 별이 박혀있다.
구슬을 잡고 있으니, 그다음 할 일은 술술 그려졌다. 구슬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외쳤다.
“삼켜라! 요괴의 정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십이지 신장들이 한꺼번에 칼을 휘둘렀다. 칼끝에서 빛이 터져 나와 요괴를 감쌌다. 빛으로 만든 그물 같다.
눈 깜짝할 사이, 요괴들이 그물망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아아악! 현덕이 살아있었나!’
‘이놈! 대왕님이 갚아주실 것이다!’
‘네 놈은 절대 못 찾는다.’
몸부림칠수록 그물은 더 깊이 요괴를 옭아맸다. 열두 개의 그물이 물방울처럼 작게 오므려지더니 구슬을 향해 날아들었다.
요괴를 삼키느라 구슬이 꿈틀댔다.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잠시 후, 언제 흐물거렸냐는 듯 차갑고 딱딱해졌다. 그저 반짝이는 유리구슬이다. 별이 늘어났겠지만,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
“널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
내 말이 끝나자마자 구슬이 사라졌다. 구슬이라 부르기는 밋밋한데? 다른 좋은 이름을 지어줘야지. 부르기 쉽고 잘 어울리는 이름으로.
호랑이가 빛을 뿜으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다음에는 진짜 내 모습을 그려다오. 네가 그린 나를 보고 싶구나.’
말을 마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짜 모습? 붓대에 새겨진 백룡을 그려달라는 말인가? 용 그림도 연습해야겠구나. 백룡은 어떻게 싸울까 궁금하다. 하지만, 지금은 뱃사공 아저씨가 더 궁금하다.
신당 앞까지 뛰어 올라갔다. 댓돌 아래에서 뱃사공 아저씨가 흑술사의 두 손을 묶고 있었다. 흑술사는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요괴가 사라졌으니 힘이 다 사라졌을 거다.
오솔길에 엎드려있던 구경꾼들이 달려와 뱃사공 아저씨와 흑술사를 둘러쌌다.
“우리를 속이더니 꼴좋구나!”
“에잇, 이 나쁜 놈아!”
사람들은 흑술사를 욕했다가 뱃사공 아저씨를 칭찬했다가, 다시 흑술사에게 손가락질했다.
악당이 잡혔으니 기분 좋아야 하는데, 씁쓸해졌다. 여태까지 꼼짝 못 하고 벌벌 떨더니 이제 와서 손가락질한다. 예전 학교에서도 그랬다.
녀석들과 친구라고 믿으며 그럭저럭 잘 지냈다. 내가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기 전까지는.
대장 노릇하던 녀석이 내게 시비 걸기 시작하니까, 다른 녀석들도 졸졸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매일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충성심을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못된 흑술사와는 정반대의 경우지만, 그때가 생각나 화가 치밀었다. 그따위 녀석들을 친구라고 믿었다니. 후우, 이럴 때가 아니지.
‘여기서는 여기 일만 생각하자.’
나는 현덕 대사의 후계자이고, 율도국을 지킬 임무가 있으니까.
“저기…. 혹시 백 도사님 아닌가?”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뱃사공 아저씨를 가리켰다.
“잉? 쫓겨났잖아? 저놈, 저 흑술사 놈 때문에.”
“저 지팡이 좀 보라고.”
산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뱃사공 아저씨의 지팡이는 검은색이었는데, 색깔이 달라졌다. 자작나무처럼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생겼다. 평범한 지팡이가 아니구나. 그럼, 아저씨도?
아저씨가 지팡이를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흑술사를 다 묶었나? 자세히 보니 굵은 밧줄이 저절로 움직였다. 석상을 잡아당기던 그 밧줄이다.
어쩐지… 이상했다. 강을 건널 때 뱃머리에서 나오던 기운, 예지몽을 꾸었다고 했지. 현덕 대사,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뱃사공 아저씨가 백 도사…?
신당 밖이 웅성웅성 시끄러워졌다.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물렀거라! 대군마마시다!”
“이제부터 관아에서 맡을 거요. 모두 돌아가시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나며 바닥에 엎드렸다. 포졸 수십 명이 언덕으로 올라왔다. 나이 많은 아전이 넓은 소매를 휘휘 내둘렀다.
“어서, 어서 돌아가게.”
“형방 나리 말을 들으시오.”
포졸들은 엎드린 사람들을 일으켰다.
“대군마마께서 직접! 처리하실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라고.”
형방이 손짓하자 지휘관이 달려와 흑술사를 끌고 갔다.
“두고 보자! 대왕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네 놈들은 절대 막을 수 없다.”
그사이 깨어난 흑술사가 고함쳤다. 지휘관이 헝겊 뭉치로 흑술사의 입을 막았다. 드디어 오솔길이 조용해졌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대군마마.”
형방의 안내를 받으며 연암대군과 무영이 다가왔다. 다친 데도 없고, 옷도 깔끔하다. 싸우지 않고 일을 해결했구나. 재주가 좋은데?
연암대군은 뒷짐을 지고 뱃사공 앞에 섰다.
“뱃사공이 아니라 백 도사였군.”
“대군마마. 일을 끝낸 건 제가 아니라….”
뱃사공 아저씨가 내 앞으로 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내가 기다린 분이오. 정 화공이 대사님의 후계자… 맞지 않소?”
이쯤 되면 내 정체를 밝혀야겠지? 맞습니다. 내가 바로….
대답하려는데 연암대군과 무영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래야 말이 되네.”
“그렇습니다. 너무나 수상했습니다.”
“요상한 단어를 쓰고, 행동거지도 이상하지 않았는가?”
두 사람끼리 말을 주고받으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예. 율도국 백성이 마마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 없지요. 꾀꼴산 화곡에 들어온 것도 석 달이 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무영이 손바닥으로 자기 팔뚝을 탁 내리쳤다.
“제가 일 년이나 걸려 터득한 수련법을 하루 만에 습득했으니까요.”
“과연. 대사님의 후계자로구나.”
연암대군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다. 우리를 찾아와줘서.”
뱃사공, 아니 백 도사도 어깨를 떨며 울먹였다.
“대사님, 우리를 버리지 않았군요. 어흐흑.”
흐느끼며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나이 많은 아저씨가 울고 있으니 난감하다. 위로해야 하나? 닭살 돋아서 그건 못 하겠고. 아, 할 일이 또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그림을 찾아야죠. 신당에 단서가 있을 겁니다.”
“그래, 정 화공은 신당을 맡아라. 무영아, 넌 흑술사를 취조하거라. 나도 공무를 처리해야겠다.”
“대군마마, 공무라니요?”
“수령을 하옥시켰거든. 할 일이 많다.”
연암대군은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지 않았다. 뭐야, 현덕 대사의 후계자라는 걸 알면서도 날 무시하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는 해줘야지.
연암대군을 따라 무영도 돌아섰다. 재빨리 무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떻게 된 거야?”
“싱겁게 끝났어.”
무영의 설명은 간단했다. 관아에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칼을 빼 들기는 했다.
그런데, 수령도, 군졸들도 몇 번 칼을 휘두르더니 몸이 굳어버렸다. 창과 칼을 든 채로, 허수아비처럼.
잠시 후에 정신을 차렸는데, 자신들 손에 무기가 들린 것을 보고는 오히려 놀라 집어던졌단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 하고.
시간을 따져보니 내가 요괴를 소멸한 그때였다. 수령은 즉시 옥에 가뒀고, 그동안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 아전들이 장부와 문서를 대령하기로 했다.
무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대로 내려갔다.
다른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림의 단서를 찾자.
마당에서 볼 때는 건물이 한 채였는데, 뒤편으로 전각이 몇 개나 더 있었다. 백 도사는 다른 전각은 둘러보지도 않고, 가장 안쪽 전각으로 곧바로 뛰어갔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책과 문서를 모아놓은 서각으로 들어갔다. 백 도사는 문 앞에 삿갓과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서고를 둘러보며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서가부터 뒤질 줄 알았는데,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정 화공, 서두르게. 이쪽 세계에서 스무닷새를 넘기지 말고.”
“예? 무슨 말씀이세요?”
스무닷새라면 이십오 일. 그게 무슨 상관이야?
“현덕 대사님도 기껏해야 이틀 정도 머물다 가셨네. 저쪽 세계에서 닷새를 넘기면 위험하다고. 이쪽에서는 한 달이 채 못 되는 시간이라 하시더군. 그렇지 않으면 이곳도 저곳도 아닌 중간 세계에 끼어버린다고.”
그럴 수가! 율도국과 현실 세계가 시간의 흐름이 달라? 가만….
‘나 언제 여기 왔지?’
십오 일은 지난 것 같은데? 더 지났나? 이러다 용궁의 전설처럼 되는 거야? 아니, 그 반대지. 현실의 시간이 훨씬 더 느리게 흐른다. 다섯 배 정도?
“저기, 그러면….”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야죠.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고요. 하지만, 백 도사는 벌써 서가 사이로 들어간 뒤였다.
“도사님!”
백 도사를 찾아 힘껏 발을 내딛는 순간, 마룻바닥이 쑥 꺼졌다. 한쪽 발이 바닥을 뚫고 빨려 들어갔다. 물컹거리는 뿌연 장막 아래 내가 살던 세계가 보였다.
현실의 내가 들것에 묶여 구급차에 실리고 있다. 할머니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하신다.
‘어, 나 여기 있는데…?’
몸과 혼, 모두 그림 속으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영혼과 정신만 들어왔나? 아닌데…. 다치면 아프고 피도 났단 말이야. 그렇다면… 내몸이 여기와 저기로 나뉘었구나.
뿌연 장막이 불끈거리며 내 발을 잡아당겼다. 점점 아래로 빨려 들어간다. 이렇게 돌아간다고?
“안 돼! 여섯 번째 그림은? 연암대군은?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데!”
힘껏 발을 뺐다. 순간, 발밑에 보이던 현실 세계가 사라지고 바닥은 딱딱한 마루로 돌아왔다. 헉! 이번에는 더 놀랐다.
“잠깐! 나… 난 어떻게 돌아가라고?”
이대로 여기, 아니 중간 세계에 갇히는 거야? 그럴 순 없어.
“안돼! 다시 열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아무리 두드려도 퉁퉁 소리만 울렸다. 손만 아프다. 잘못 내리쳤는지 손가락뼈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심하게 저릿했다.
“이럴 수가….”
멍하니 주저앉았다.
‘아니야. 아닐 거야. 숙제를 끝내면 돌아갈 수 있어. 스무닷새를 넘기지 말라고? 아직 열흘 남았어. 그사이에 찾으면 돼.’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일을 끝내면 돌아갈 수 있어. 여기 올 때 갑자기 그림이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문이 열릴 거야.
벌떡 일어나 서가로 뛰어들었다.
백 도사는 창문 옆에 서 있었다. 종이쪽지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어찌나 골똘히 생각하는지, 내가 바짝 다가가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저씨, 뭘 찾으셨어요?”
“정 화공. 이게 무슨 뜻 같나?”
백 도사가 휘갈겨 쓴 쪽지를 내밀었다.
- 나무는 숲에 숨겨라.
- 비밀은 비밀을 키우는 자에게 보내라.
- 사람은 풀지 못하는 결계 속으로.
그게 다였다. 이름이나 지명 같은 단서는 없었다.
“비유 같은데요. 무슨 뜻일까요?”
“이건 흑술사의 필체가 아니오. 대왕 요괴가 다른 사람을 숙주로 삼았나 보군.”
“도사님, 대왕 요괴는 홍길동, 아니, 대선조께서 무찌르지 않았나요?”
백 도사는 한숨을 쉬고는 쪽지 세 장을 내려놓았다.
“다른 요괴가 대왕이 되었지. 왕이 죽으면 후계자가 왕이 되는 것처럼. 요괴도 마찬가지라오. 가장 강한 놈이 대왕이 되지. 서로 왕이 되겠다고 다투느라 사람들만 죽어 나가고.”
백 도사가 혀를 끌끌 찼다.
“사람들은 요괴를 모르니, 그저 하늘이 내린 벌이라 여긴다오. 홍수와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터지니 천재지변이나 다를 바 없지만….”
그렇다면 지금 있는 대왕 요괴부터 무찌르고, 다음에도 또 없애면 되지. 앞으로도 나는 계속 율도국에 들어올 테니까.
“연암대군께 보여야죠.”
쪽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때, 연암대군이 말했잖아.
‘누군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 용상을 노리는 역도의 무리겠지. 요괴와 손을 잡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어.’
그 역도가 누구인지 연암대군은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