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고 어느새 밤이 되었다. 하늘이 흐려 달도, 별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구름이 빛을 반사해 어둡지 않다.
관아의 다른 방은 불이 꺼졌는데, 관사 사랑방만은 환하게 불이 켜졌다.
방에서 연암대군과 무영의 말소리가 들렸다. 할 일이 많다더니, 아직도 문서를 읽고 있구나. 신당에서 찾은 쪽지만으로도 굉장한 수확이지만, 이럴 때는 야식이 필요하지.
살금살금 부엌을 뒤져 타래과와 녹차를 찾아냈다. 이런 걸 찾아내는 눈치는 빠르다. 물론,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비법도 있지만.
사랑방 문앞에서 서서 연암대군을 불렀다.
“마마, 신당에서 쪽지를 찾아냈습니다.”
문이 열리고 무영이 쟁반을 받았다. 타래과를 보고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좋으면 좋다고 하지 뭘 참고 그래. 무사라서 다른가.
나도 방석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흑술사한테 뭘 좀 알아냈어?”
“쓸만한 것이 없다. 계속 횡설수설이야. 아무도 모른다, 사람은 못 찾는다고 이를 갈다가 목숨만 살려달라고 울다가….”
무영은 어이없다며 흥, 콧소리를 냈다.
“자신도 속아서 꼭두가 되었기에 대왕 요괴는 모른다더군.”
“거짓말에 서투르네. 사기꾼은 말빨을 타고나던데.”
“뭐? 말을 빨리 탄다고?”
“아, 아니.”
연암대군은 졸음을 애써 쫓으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쪽지를 보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품에서 세 장의 쪽지를 꺼냈다. 과연 연암대군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이건….”
역시 알고 있었어. 대왕 요괴가 숙주로 삼을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지만, 연암대군은 침묵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썹만 찌푸렸다. 무영도 과자를 우물거리기만 하고 말이 없다.
도저히 못 기다리겠다. 어서 끝장을 내야지. 그래야 나도 현실로 돌아간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에 끼어있다가 죽을 수는 없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가 다 지우고 가장 그럴듯한 것만 남겼다.
“대왕 요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겁니다. 흑술사를 꼭두로 쓰려면 가까이에서 감시해야 하니까요.”
연암대군이 세 장의 쪽지 중 하나를 내밀었다.
“나무는 숲에 숨겨라. 대왕 요괴가 요괴들 사이에 있다는 뜻인가?”
“그럴 수도 있고요. 사람들 사이일 수도 있습니다.”
신당에서 백 도사 아저씨가 설명해 주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요괴 이야기와 똑같았다.
요괴는 사람의 탐욕을 먹이로 삼는다. 대왕 요괴가 숙주로 삼은 자는 누구보다 욕망이 강할 것이다.
“율도국에서 가장 큰 야망을 가진 자가 누구일까요?”
“야망이라면….”
연암대군은 서탁 모서리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무는 숲에, 요괴는 욕심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비밀을 키우는 자라….”
연암대군은 두 장의 쪽지까지 모두 내려놓고나서 무영에게 손짓했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예. 마마.”
무영은 칼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기다렸다. 드디어 시험의 마지막 실마리인가.
연암대군은 말없이 촛불만 바라보았다. 문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멈춘 것처럼 바람도 가라앉았다.
“정 화공.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느냐?”
“예?”
그런 경험이라면 날 따라올 사람이 없다. 친구라 믿었던 놈들이 내게 무슨 짓을 했던가! 나한테 힘이 있었다면 꼼짝 못 할 녀석들이!
“대군마마를 배신하다니…. 잡아다 감옥에 처넣어야죠. 아니, 단칼에 죽여야죠.”
“비밀을 키우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 신율회라고 들어보았느냐?”
“시늉회요? 모릅니다.”
“홍율을 세자로 삼으려는 대신들의 비밀 모임이지.”
“예?”
놀라서 몸이 옆으로 기우뚱거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람의 욕망이라면 역시 돈과 권력이다. 돈은 사람이 많은 한성으로 몰린다. 권력이라면 역시 왕이 되고 싶은 욕심?
가장 큰 야망을 가졌다면… 율도국의 수도 한성. 그중에서도 궁궐이다.
이거… 며칠 전에 들었는데? 그림 속으로 들어온 첫날, 진보전에서. 그림 속 고양이와 사슴, 모란이 떠들어댄 이야기였다.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이 많다옹.’
‘대선조의 참뜻을 펼치겠다며 개혁을 주장하는 대신들도 있습니다.’
‘그리 높은 벼슬에 오르고도 욕심을 내다니요.’
그때 이미 답을 들었던 거야? 그걸 지금 눈치채다니…. 대왕 요괴가 숙주로 삼을 정도라면 아주 높은 벼슬, 정승밖에 더 있어?
“신율회 수장은 나의 스승이셨다.”
“범인이 누군지 아시면 당장 체포하시죠.”
“좌의정, 홍율의 외할아버지이다.”
홍율이 누구인지 안다. 연암대군의 배다른 동생. 올해 겨우 일곱 살이다.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잖아. 왕위를 노리는 간신들과 외척과의 암투. 뭐야,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구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간단하잖아? 연암대군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좌의정을 잡는 거다. 거기 대왕 요괴가 숨어있을 테니 놈을 잡고, 현덕 대사의 잃어버린 그림까지 찾으면 미션 클리어!
서둘러야 한다. 현실에서의 내가 구급차에 실려 갔다. 어떤 상태인지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며칠 남긴 했지만, 솔직히 불안하고 초조하다. 아주 많이.
연암대군은 세 장의 쪽지를 나란히 펼쳐놓고 한숨을 쉬었다.
“형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분도 이렇지 않았다. 내가 세자가 될 가능성이 없을 때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셨지.”
그 말을 들으니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나를 따돌리던 녀석들이 바로 그랬다. 내가 상 한 번 못 받고, 성적도 바닥을 긁을 때는 친구라고 끼워주었다. 중학교 때에도 미술학원과 수학학원에 같이 다녔다.
녀석은 대장 노릇을 못 하면 성질을 부렸는데, 그냥 참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아버지가 엄청난 부자에다, 학교와도 관계가 깊었다. 시에서 무슨 의원을 지냈다나. 선생님들도 쉬쉬거렸다.
힘들어도 집에는 얘기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알면 걱정하실 게 뻔하니까.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미술대회에 나가 처음으로 대상을 받았다. 그때부터였다. 대회에서 상 받는 사람은 언제나 녀석이어야 했으니까.
그 후에도 내가 계속 상을 받자 괴롭힘이 심해졌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미술부에도 못 들어갔다. 학원도 옮겼고, 미술대회에도 나가지 못했다. 미술 선생님이 추천해 줘야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제외되었다. 학교 추천이 없어도 되는 대회에만 나갔다.
오기로 버티려 했지만, 결국 전학을 결심했다. 2층에서 떨어진 화분에 맞고 나서 바로. 이상한 기분이 들어 몸을 피했지만, 왼쪽 어깨와 팔을 크게 다쳤다.
분명 의도적으로 던졌는데, 선생님들이 먼저 나서서 실수라고 했다. 창틀의 화분을 옮기다가 미끄러졌을 것이라고, 내가 운이 나빴다고만 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이가 갈린다. 하지만, 다시는 억울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와서 나는 달라졌다.
난 현덕 대사의 후계자이고, 신기한 붓의 주인이니까. 내가 바로 율도국의 수호자라고.
“…하느냐?”
“예?”
생각에 빠져 연암대군의 말을 듣지 못했다.
“정 화공이라면 용서할 수 있겠느냐?”
“아니오. 절대 용서 못 합니다. 그 녀석을 다시 만나면 멱살을 잡고….”
이빨을 앙다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연암대군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이 얘기가 아니지. 나는 머리를 조아리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역모를 꾸미는 좌의정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더 중요하다. 이건 왕따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달린 일이다.
“왕의 자리는 덫과 같다. 타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지.”
연암대군은 일어나 창가로 갔다.
“허나, 좌의정이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용서할 것이다. 그만큼 정세에 밝고 계략에 뛰어난 대신이 없으니.”
“그게 가능합니까? 역모죄인데요?”
“군주는 냉철하면서도 천하와 백성을 모두 끌어안아야 한다. 좌의정도 나의 백성이 아닌가.”
창문을 여니 구름이 지나가고 밝은 달이 나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구름이 빠르게 밀려갔다. 연암대군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얼굴을 비추어 환하게 빛났다.
그래, 이런 사람이 왕이 되어야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현실로 돌아갈 걱정은 나중에 하자. 두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 터질 것 같다.
“한성으로 돌아가시죠. 대왕 요괴가 있는 곳에 그림도 있을 겁니다.”
“그 넓은 한성에서 어디로?”
“좌의정의 집으로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요괴가 사람의 욕망을 먹이로 삼는다면 먹이 가까이 있겠지.
“서두르자. 아바마마의 병환이 깊다. 좌의정이 역모를 꾸민 사실을 알면 충격으로 쓰러지실 거다.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겠느냐?”
“해봐야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진보전에서 보았던 그림, 여섯 장이 모여야만 완전해진다. 그래야 요괴가 힘을 잃고, 요괴와 결탁한 세력도 힘을 잃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찾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만약 찾지 못하면….
하나라도 부족하면 힘의 불균형을 부른다. 이 상태가 오래가면 왕은 병으로 죽고, 야망이 가장 큰 사람이 왕이 될 것이다.
그림이 사라지고 벌써 십오 년이나 지났다. 왕의 건강이 나빠진 것도, 대왕 요괴가 좌의정을 숙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세 번째 쪽지를 집어 들었다.
‘사람은 풀지 못하는 결계 속으로.’
대왕 요괴의 결계, 당연히 사람은 풀지 못한다. 하지만 난 율도국 사람이 아니거든. 내 무기도 사람의 것이 아니고. 그러니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