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으로 돌아가려면 다시 비단강을 건너야 한다. 이번에도 백 도사의 배를 탔다. 다른 배를 타겠다고 했지만, 백 도사는 꼭 자신이 배를 몰겠다고 나섰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신당을 수리하느라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없고요.”
신당의 주인이 할 일이 없다니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주인이 빠지면 일이 안 될 텐데.
“그래 주면 고맙네.”
연암대군은 알면서도 모른 척 인사했다. 가만히 보면 애늙은이다. 나랑 나이가 같은데 세상을 두 번 사는 것처럼 어른스럽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할 것 같다.
처음 탔던 배와는 다른 크고 좋은 배였다. 배는 달라도 뱃머리에 그려진 문양은 똑같았다. 동그라미 안에 해와 달과 별이 들어있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림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현덕 대사님이 알려주신 문양이야. 오가는 길을 지켜주지.’
아하, 할아버지가 만든 문양이란 말이지? 오가는 길을 지켜줘? 그렇다면…. 문양을 그대로 외워버렸다.
바람도 약하고 물살도 세지 않으니 배는 천천히 나아갔다. 백 도사 아저씨는 여전히 삿갓을 쓰고 뱃머리에 서서 노를 잡았다. 능숙한 솜씨이지만, 문제는 배가 너무 느리다는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영와 나는 뒤편에서 노를 잡았다. 빨리 한성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나루터에 닿자 무영은 연암대군을 따라 먼저 내렸다. 나는 아쉬움에 백 도사를 돌아보았다.
“갈 때는 뱃사공이었는데, 나올 때는 백 도사라니 신기해요.”
“정 화공도 마찬가지 아닌가.”
백 도사는 삿갓을 살짝 들어 올렸다. 수염도, 주름도,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옷이 바뀌어서인지 진짜 도사 같고, 영력도 뛰어나 보였다.
“명심하게. 이 세계와 저쪽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달라. 최대한 빨리 끝내게.”
“예. 일이 끝나는 대로 돌아갈 거예요.”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세.”
백 도사는 주머니에서 검은 실로 엮은 팔찌를 꺼냈다. 내 손목에 팔찌를 매주었다.
“내 술력을 담았으니 자네 힘이 더 강해질 거야. 내가 처음 도술을 배울 때도 현덕 대사님이 손수 매듭을 지어주셨지.”
소매를 걷어 손때 묻은 팔찌를 보여주었다. 실이 낡아 보풀이 일어났지만,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술력이 담긴 팔찌가 백 도사에게 가고, 백 도사의 술력이 담긴 팔찌는 내게로 왔다. 신기한 인연이다.
“고맙습니다. 아저씨도 잘 지내세요.”
백 도사 아저씨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저씨가 정말 잘 지내기를 바란다. 비단강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찾고,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냈다. 까마귀도 만났는데…, 가만, 까마귀는 어디 갔지?
둘러봐도 조그맣고 까만 새는 보이지 않았다. 무영의 옷자락으로 돌아갔나. 거기 있는 것보다는 까마귀가 더 좋은데. 시끄럽고 버릇없지만, 필요한 걸 알려주니까.
그래도 나올 때가 되면 다시 나오겠지.
‘곧 마지막 싸움이야. 그때까지 쉬고 있어.’
무영의 검은 옷을 보며 중얼거렸다.
뭍에 내리고 나서는 한성까지 쉬지않고 달렸다. 역사에서 말을 바꿔 타고, 밤늦게 잠들었다가 새벽 일찍 깨어났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렸는데….
한성은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저잣거리는 활기차고 들떠있었다. 상인들은 손님을 부르며 걸걸한 소리로 외쳐댔다. 포졸들도 줄 맞추어 거리를 걸었다.
지게꾼과 보부상들이 짐을 메고 몰려갔고, 달구지도 여기저기서 달그락달그락 바퀴 소리를 냈다.
‘여긴 아무 일도 없구나. 다행이다.’
말 등에 앉아 적당히 흔들리며 사람들을 구경하니까 내 마음도 즐거워진다. 이걸 동영상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 대박 날 텐데. 스마트폰이 없어서 아쉽다.
연암대군을 따라 궁궐로 말을 몰았다. 율도국에 온 다음부터, 난 뭐든 빨리 배운다. 이제는 제법 말도 잘 다루고, 엉덩이도 아프지 않다. 그동안 무영에게 배운 무예 덕분인가. 어? 그런데 무영은?
“대군마마, 무영은 어디 갔습니까?”
“사정을 알아보러 갔네.”
“좌의정 집으로요?”
“아니, 저잣거리.”
저잣거리에 무슨 사정? 시장을 둘러보았다. 이상한 건 없는데? 떠날 때와 비슷하다. 뭔가 있나?
“안 보이느냐? 정 화공의 재주는 그림에만 통하나 보구나.”
연암대군은 피식 웃으며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구경하느라 정신 놓고 있는 동안에도 연암대군과 무영은 다른 걸 보았다는 건데. 대단한 능력자들이다.
궁궐 가까이 도착했을 때, 무영이 말을 몰고 달려왔다.
“마마, 일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바마마께 문안만 드리고 갈 테니, 사저에서 기다려라.”
“예.”
무영은 오던 길로 말머리를 돌렸다. 연암대군은 말도 없이 궁궐로 가버렸다. 난 어느 쪽으로 가지? 말고삐를 붙잡고 두리번거렸다. 무영이 발로 내 정강이를 툭 쳤다.
“뭐하냐? 따라오지 않고.”
나도 사저에서 기다려야 하는구나.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무영 옆으로 말을 몰아 나란히 섰다.
“시장에 무슨 일 있어?”
“들어오면서 못 느꼈냐? 상인들이 부쩍 늘었잖아?”
“상인이 많으면 좋은 거 아냐?”
“진짜 상인이면 그렇지. 모두 훈련된 자들이다. 자세나 걸음걸이가 달라. 다만….”
“다만?”
“눈빛이 조금 이상해. 취한 것처럼.”
낮부터 술에 취한 건 아닐 테고, 최면에 걸렸나.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이다. 대왕 요괴가 불러들였구나. 생각보다 더 골치 아파졌다.
“그 사람들은 어디 있어?”
“야산에 천막을 쳤어. 갑자기 사람이 많아져 여각에 방이 없다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더군. 곧 일이 터질 거다.”
“흑술사가 잡혀서 서두르나?”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냐? 조심해. 놈들은 널 가장 먼저 노릴 테니.”
그 생각은 못 했다. 대왕 요괴는 당연히 현덕 대사의 후계자부터 죽이려고 하겠지. 내가 요괴의 첫 타겟이 되는 건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목을 짚었다. 제대로 붙어있다. 무섭고 두려워야 하는데… 왜 이렇게 짜릿하지?
사저에 도착해서도 잠깐밖에 쉬지 못했다. 사실,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어찌나 벌렁거리는지, 아랫배까지 움찔거리는 것 같다.
사랑방에 연암대군과 무영, 나까지 셋이 모였다. 처음 왔을 때, 무릎 꿇고 엎드려있던 그 방이다.
바닥을 확인했던 항아리도 그대로 있고, 그림도, 붓걸이도 그대로 있었다. 한 번 본 것이라 그런지 눈에 익어서 긴장이 줄었다. 저녁을 푸짐하게 얻어먹어서 마음이 편해졌나.
“누구도 다치지 않고 끝낼 방법이 있겠느냐?”
연암대군은 역시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다. 역모를 일으키려는 무리를 상대로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라니.
좌의정이 어떤 사람인가. 대왕 요괴의 숙주인 데다 자기 손자를 왕으로 삼아 수렴청정하려고 벼르는 사람이다. 사병들이 상인으로 위장하고 들어오지 않았나. 그런데도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라니!
그러나 못 할 것도 없지. 내가 누구야! 율도국의 수호자 정지민이라고.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내 말에 연암대군과 무영이 눈을 빛냈다. 부담스럽지만… 몹시 뿌듯하다. 헤헷.
“좌의정을 집에서 나오게 하고, 집안 식구들, 그러니까 일꾼들까지 대문 바깥으로 내보내면 제가 가서 요괴를 없애겠습니다.”
“그게 가능해?”
무영이 주먹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그, 그러니까….”
좋은 방법이 생각날 듯 말 듯 머릿속이 아리송하다. 연암대군이 구원자처럼 나섰다.
“좌의정은 궁으로 부를 수 있다. 북쪽 지방의 기근이 심해 원조가 필요하다. 이미 구휼미를 보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할 거다. 다른 방안을 논의하자고 부르면 된다.”
“좋습니다. 그럼, 집안사람들은….”
이건 무영이 할 일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무영의 검은 옷에 불빛이 아른거렸다. 저 안에 시커먼 까마귀가 잠들어 있다. 깃털이 아주 시커먼…. 그렇다! 시커먼!
“연기를 피우는 겁니다. 무영도 도술을 부릴 수 있잖아요? 집안 여기저기서 연기가 나면 모두 대피하겠죠. 불을 끄러 몰려다닐 테니 저는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말하고 나니 좋은 생각이 이어졌다.
“일꾼으로 위장하겠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요괴의 기운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결계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요.”
“정 화공 혼자?”
물론 혼자는 아니다. 백룡의 붓이 있고, 까마귀가 있다. 구경거리가 생겼는데 안 나타날 녀석이 아니지. 하지만,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아서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합니다. 많으면 오히려 눈에 잘 띕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가장 적당하구나.”
“내일 당장 시작할까요?”
“그래. 내일.”
잘 됐다. 빨리 끝나야 빨리 현실로 돌아가지. 병원에 실려 간 내몸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 내가 살아있으니 죽지는 않았을 테고… 계속 자고 있을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지만, 힘껏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지금의 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