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율도국의 수호자

by 록시

“불이야! 불이야!”

좌의정의 저택이 자욱한 연기에 휩싸였다. 안채와 사랑채, 담장을 따라 지어진 행랑채까지도 매캐한 연기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연기에 모든 하인이 한꺼번에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무영이 피워 올린 연기는 뿌옇고 짙은 데다, 타는 냄새도 섞여 있다. 도술은 초급이라지만, 연기는 아주 훌륭했다.

“불을 꺼라!”

“빨리빨리 움직여!”

날카로운 목소리에 하인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더니 곧 줄을 지어 몰려다녔다. 누군가는 빗자루와 삽을 들고 뛰어왔다. 몇 사람은 물 항아리로, 뒷마당의 우물로 달려갔다. 어떤 이는 들통을 들고 연못으로 뛰어갔다.

‘지금이다!’

담장 안을 지켜보다가 뒷문까지 달려갔다. 가장 얕은 부분을 골라 가볍게 뛰어넘었다. 여기까지는 연기가 오지 않았다. 하인의 옷을 훔쳐 입었지만, 누가 알아볼지 모른다. 담장에 바짝 붙어 몸을 숙였다.

연암대군이 알려준 대로 사랑채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사랑채 옆 서각이 이번 작전의 목적지이다.

‘사랑채 옆에 서각이 있을 거다. 겉으로는 곡식 창고처럼 생겼다더구나. 귀한 책과 그림을 모아두어 좌의정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곳이다.’

나무는 숲에 숨긴다는 뜻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을 그림 속에 숨겨놓으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생각이다.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 사랑채 앞도 짙은 연기에 싸였다. 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몸을 숙였다.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소리에 이어 누군가의 고함이 들렸다. 앞마당에서 하인들에게 지시하던 그 목소리였다.

“너희 둘! 빨리 사당으로 가라!”

“청지기님! 여기도 연기가 심합니다요.”

“사당이 먼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한다.”

연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보이지 않지만, 청지기의 목소리는 아주 다급했다. 사랑채의 서각보다 더 중요하다고? 설마….


따질 것 없이 하인들을 따라 뛰었다. 사당은 집안에서도 가장 북쪽, 경사진 언덕 위에 있다.

발소리를 죽이고 좁은 길로 따라 들어갔다. 나무 뒤에 숨어 사당을 살폈다. 길 끝에 낮은 담장과 작은 문이 보이고, 그 뒤에 기와지붕이 보였다. 여기까지는 연기가 오지 않았다.

연기 대신 다른 것이 있었다. 결계,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강한 결계가 쳐져 있었다.

‘저기구나!’

결계는 부적이나 마법진 위에 만든다. 어느 곳이든 그림이 들어가니까, 그림 읽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보인다. 내가 이렇게나 대단한 능력자였다니!

“여기는 괜찮은데?”

“어서 가자고. 이러다 집이 다 타버리겠네.”

하인들은 사당이 안전한 것을 확인하고 허둥지둥 뛰어 내려갔다. 그들이 연기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무 뒤에서 기다렸다.

‘찾았어! 그림도, 대왕 요괴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갔지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신발을 벗을 여유도 없었다. 창살문을 벌컥 열고 힘껏 발을 내디뎠다.


‘어? 사당으로 들어왔는데?’

여긴… 만물상? 나는 어느새 할아버지의 가게에 와 있었다. 만물상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할아머지는 햇빛이 잘 비치는 창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우리 지민이가 왔구나.’

할아버지가 활짝 웃었다. 반갑게 맞아주시는데, 내 가슴은 왜 이리 먹먹하냐. 할아버지!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잘 컸구나. 어른이 다 되었어.’

“할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돌아가셨잖아요?”

‘널 만나러 잠깐 내려왔지.’

할아버지는 여전히 다정하다. 만물상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고민이 사라질 것 같다.

“다시 오실 줄 알았어요. 이렇게 그냥 가실 리 없죠.”

‘율도국에 갔었느냐?’

“예. 대왕 요괴를 잡으려고 들어왔는데, 제가 왜 여기 있죠?”

‘큰일 날 뻔했구나. 거긴 위험해. 언제 죽을지 몰라. 어서 나가거라.’

할아버지는 내 손을 쓰다듬었다. 일을 많이 해서 까칠하지만, 따뜻하다.

“연암대군을 도와야 해요. 제가 꼭 필요해요.”

‘남은 가족도 생각해야지. 얼마나 걱정하겠니? 네 몸… 언제까지 그대로 둘 거냐?’

“어떻게 아셨어요?”

할아버지는 하늘에서도 날 지키고 있었구나. 역시 현덕 대사의 명성이 그냥 생길 리 없지.


빠각빠각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까마귀가 부리로 문살을 쪼아대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여긴 너무 위험해. 너에겐 너의 세계가 있어. 넌 그냥 정지민으로 살아라.’

“할아버지도 율도국을 지키고 싶어 하셨잖아요?”

얼마나 율도국을 아끼셨는데. 내가 걱정되어 그러실까. 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사이에도 까마귀가 빠각대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뭐라고 꽥꽥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시죠? 연암대군을 도울 방법이요.”

‘가라니까! 넌 방해만 된다!’

할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는 내 손을 휙 뿌리쳤다. 나한테 화내신 거야?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빠각거리던 까마귀 소리가 쩌렁쩌렁 귀에 울렸다.

“팔푼아! 정신 차려!”

할아버지가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불꽃이 튀더니 곧장 까마귀를 향해 날아갔다.

“우왁!”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였지만, 불꽃이 날개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꽤액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치지직 사라졌다.

‘어린 놈이라 살려주려 했건만!’

할아버지의 모습이 물결치며 일그러졌다. 만물상도 사라지고 주변은 온통 새까만 공간으로 바뀌었다.

내 앞에는 거대한 짐승 요괴가 서 있었다. 거대한 몸집에 늑대 머리가 달렸다. 눈은 시뻘겋고, 털은 온통 새까맣다. 몸은 사람인데 송곳니는 호랑이보다 컸다.


“이, 이… 감히 우리 할아버지를 모욕해?”

용서할 수 없다! 먹먹했던 가슴이 횃불처럼 타올랐다. 품에서 백룡의 붓을 꺼내 들었다. 왼손에는 무영이 준 단검을.

‘이번에는 진짜 백룡을 불러내겠어!’

주문을 외우자마자 붓끝으로 빛이 모여들었다.

“카악!”

대왕 요괴가 앞발을 휘둘렀다. 놈의 발톱에서 불덩이가 피어올랐다. 단검으로 불덩이를 튕겨냈다. 불덩이가 계속 쫓아다녀 붓에 집중할 수 없다. 빛이 모이는가 싶으면 피시식 사라졌다.

‘크하학! 무모하구나. 제 몸이 어떤지도 모르고 날뛰다니. 널 죽여주마.’

“웃기지 마. 너야말로 곧 소멸할 거다!”

떠다니던 불덩이들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화살처럼 길고 뾰족하게 바뀌더니 내게로 날아왔다. 단검으로 쳐내기에는 너무 많고 너무 빠르다.

불화살 하나가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이를 꽉 물었다. 이 정도 상처에 쓰러질 줄 알고!

까마귀가 날아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집중해! 백룡은 네 기운으로 움직여. 의식을 모아!”

까마귀는 쉬이익 열기를 삼키며 몸을 부풀렸다.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니 센 바람이 일었다. 날아오던 불화살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이놈!”

대왕 요괴가 앞발을 치켜들었다. 발끝에서 작은 회오리가 일어났다. 회오리 속에서 파지직 번개가 치고 있다. 저기 맞으면 까마귀는 타죽을 거야. 나는 붓을 꽉 쥐었다.

‘백룡을 불러야 해. 진짜 백룡을!’

내 의식과 기운으로 움직인다고? 집중하자, 집중해. 백룡만 생각했다. 대왕 요괴를 집어삼킬 백룡을 붓대에 새겨진 그 모양대로.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또렷해졌다. 빠르고 선명하게 허공에 선을 그었다. 붓이 지나간 선대로 빛이 모여들었다.

빛은 눈 부신 백룡이 되었다. 사납고 힘차고, 재빠르면서도 아름다운.


콰아앙. 대왕 요괴가 회오리를 쏟아냈다. 회오리는 번개를 뿜으며 달려왔지만, 백룡이 포효하자 방향을 잃고 말았다. 공기가 진동하면서 파도처럼 회오리를 밀어냈다. 그 충격에 내몸도 비틀거렸다.

백룡은 곧바로 대왕 요괴를 향해 날아갔다. 이제 된 건가? 까마귀가 날개로 내 뒤통수를 쳤다.

“꼬맹이! 네가 약해지면 백룡도 약해진다. 집중해. 모두 끝날 때까지!”

날개가 커져서 꽤나 아프다. 머릿속이 얼얼하다. 아우, 나도 안다고. 정신 집중!

‘이긴다, 반드시 이긴다. 나의 백룡은 요괴 따위에 지지 않아.’

백룡이 꼬리를 휘둘러 대왕 요괴를 붙잡았다. 꽤애액! 요괴가 몸부림치며 돌 긁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용이 시뻘건 불을 내뿜자 숯처럼 타버렸고, 백룡은 대왕 요괴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끝났다. 대왕 요괴를 무찔렀어. 세상의 어둠이 사라졌다고!

어둠뿐이던 공간도 사라졌다. 나는 햇빛이 드는 사당 안에 서 있었다. 까마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잘했다. 나를 제대로 불러냈구나.’

백룡은 짧게 인사하고는 지붕 위 하늘로 날아올랐다. 벌써 가는 거야? 이렇게 끝나는 거냐고?

사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푸른 하늘에서 하얀 용이 몸을 비틀며 날아다녔다. 그 모습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아래위로, 옆으로, 천둥 같은 웃음소리로 박자를 맞추었다.

저렇게나 좋아하다니…. 오랫동안 갇혀있었으니 많이 갑갑했겠지. 어차피 나한테만 보이니까 자유를 누리는 것도 좋겠다. 그런데….


“백룡이다!”

“진짜! 백룡이 나타났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다른 사람에게도 보인다고?

저택 마당을 내려다보니 연기는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삽과 빗자루를 든 사람들, 바가지와 물동이를 든 이들 모두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대사님이 돌아오셨어!”

“율도국의 수호자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들키면 안 된다. 하인 옷이라지만, 어쨌든 훔쳐 입었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왔으니 도둑이나 다름없잖아. 사당에 들어간 것까지 알면 더더욱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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