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그늘로 숨어 들어갔다. 백룡은 여전히 하늘에서 춤추고 있다. 이래서는 사람들이 쉽게 떠나지 않을 텐데. 웅성거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자.
나무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가 꾸물거렸다. 형체도 없이 스멀스멀 움직인다. 예전에 만났던 젤리 요괴랑 비슷하다.
‘대왕이 사라졌다. 이제부터 내가 대마왕이다.’
반대편 그늘에서도 비슷한 그림자가 꾸물거렸다.
‘허튼 소리! 내가 대왕이야. 여긴 욕심꾸거리들이 수두룩하거든. 다 내 거다.’
‘크크큭, 아니, 나다.’
그늘 여기저기서 그림자 요괴가 기어 나왔다. 검고 투명한 아지랑이 같다. 땅 위로 솟아나온 검은 아지랑이들이 한데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네까짓 게 사람을 다룬다고?’
‘당연하지. 하나같이 욕망덩어리야. 크면 클수록 맛이 좋지. 그냥 건드리기만 하면 되거든.’
‘크큭. 희망을 미끼로 던져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다. 일단 물면 놓지 않아.’
‘그때부터는 구경만 하면 돼.’
그림자들의 다툼은 끝도 없었다. 현덕대사의 후계자가 여기 있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대왕이 되려는 욕심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빛나는 백룡이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데 그조차 모르다니.
사라졌던 까마귀가 내 앞으로 통통 튀어왔다.
“꼬맹이! 그림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결계가 사라져서….”
“쉿! 저것 좀 봐.”
까마귀는 싸우는 요괴들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 눈에도 가소로울 정도이니 까마귀에는 더 심하겠지.
“기다려. 저것들부터 치우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으니까, 신비한 종이도, 붓도 필요 없다. 손을 들어 만물상 창고에 있던 구슬을 불렀다. 이름도 지었다. 용과 함께 일하는 구슬이니까….
“여의주! 소환!”
별이 가득 든 야구공만 한 구슬, 여의주는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요괴를 삼켜 버렸다. 그림자 요괴들은 끌려 들어가면서도 서로 엉켜 싸웠다. 구슬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에야 히익, 짧은 비명을 질렀다.
어쨌든 별 네 개가 늘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 없지만.
까마귀가 날개를 파닥이며 바닥을 굴렀다. 어휴, 숨 쉴 틈도 안 주네.
“서둘러!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알았어. 그림을 찾았다고? 어디….”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한테도 그림의 신호가 들린다.
‘수호자여, 나를 찾아주시오.’
잃어버린 그림이 나를 부르고 있다. 결계에 싸여있어 여태까지 찾지 못한 호작도. 신호는 사랑채에서 나오고 있었다. 다음은 사랑채!
집안의 연기도 사라지고, 하늘의 백룡도 사라졌는데 하인들은 여전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마당을 가득 채웠던 시커먼 연기는 까맣게 잊었다. 우와, 우와 감탄하고만 있었다.
“봤어? 봤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가서 자랑해야지.”
“대사님이 돌아오셨어! 나라에서 잔치를 열 것 아닌가?”
모두 어깨를 덩실거리다가 뛰어나갔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른 집 하인들도 몰려나와 대문 밖이 시끌시끌했다. 일이 쉬워졌다. 나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잖아?
하인들 틈에 무영이 서 있었다. 내가 손짓하자 무영이 바람처럼 뛰어왔다.
“그림이 여기 있어. 망을 봐줘.”
“알았다.”
무영은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하인 옷에 빗자루까지 들어도 전혀 일꾼처럼 보이지 않지만, 모두 나갔으니 안심이다.
사랑채 툇마루로 올라섰다. 대문 밖에서 꽹과리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 모두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길을 잃었네. 하늘이 우르릉
어두운 하늘 버리고 새 하늘을 열겠다. 콰르릉
붉은 잎 지면 푸른 싹 돋으리니
에헤야 풍년 온다 에루화 태평성대.”
내 뒤를 따라온 까마귀도 흥얼거렸다. 이 정도면 그림 찾을 시간은 충분하다.
꽹과리 소리에 맞춰 그림이 보내는 신호도 강해졌다. 처마 아래 지붕을 받친 통나무 위에서.
‘대들보 위?’
좁은 틈으로 족자 봉 끄트머리가 보였다. 저 높이라면 날개 달린 까마귀가 나서면 되겠어.
“그림이 저기 있어. 갖다줘.”
‘캬악, 네가 부르면 올 텐데?’
까마귀는 목을 크릉거렸다. 그렇군. 내가 바로 수호자니까. 두루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호작도! 내게로 와라!”
‘호작도’라고 부르자마자 그림이 훌훌 내려왔다. 오라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림은 내 손에 들려있었다. 여섯 번째 그림. 드디어 찾았다.
무영과 함께 곧바로 궁궐을 향해 달렸다. 바람이 된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 일렁이는 말갈기가 꼭 손뼉 치는 것 같다.
불가능해 보이던 시험을 통과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겁쟁이인 내가 여기, 율도국에서는 현덕 대사의 후계자이며, 영험한 수호자이다.
나한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 그림도 읽고, 요괴도 물리치고, 잃어버린 보물도 찾아냈다. 백룡의 붓만 있으면 난 천하무적이다.
궁궐까지 가는 길에도 사람들이 몰려나와 북과 장구를 두드렸다.
“수호자 만세!”
“에루화 태평성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두드리고 고함을 쳐대서 말도 놀라 주춤거렸다. 하지만, 정작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그건 다행인데, 조금 서운하네.
축제 분위기는 궁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도 백룡이 잘 보였을 테니까. 빨리 일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가야지.
연암대군도 기쁜 얼굴로 뛰어나왔다.
“여기서도 백룡을 보았다. 아바마마도 쾌차하실 것이다.”
“그림도 찾았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설명은 나중에 듣자. 이쪽이다.”
연암대군이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서두르느라 그림을 꺼낼 여유도 없었다.
진보전은 처음 봤을 때 그대로였다. 그때는 눈을 가리고 들어왔지만, 지금은 복도며 벽이며 똑똑히 바라보면서 걸었다. 궁궐의 다른 전각과 비슷하지만, 보물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에 더 아름답고 신비롭다.
미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보았던 비밀의 문도 그대로이다. 방 안에 걸려있던 다른 그림 다섯 장도 호작도의 기운을 느꼈나 보다.
얼마나 요란하게 신호를 보내는지 나 혼자서도 찾아갈 수 있겠다. 내 손에 들린 호작도도 불끈거렸다. 자기 자리를 찾아가서 기쁜가? 내 심장이 뛰는지, 그림이 꿈틀거리는지 나도 헷갈린다.
자국만 남아있던 빈자리에 그림을 걸었다. 연암대군이 뿌듯한 얼굴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정 화공, 네 덕이다.”
“아닙니다. 그림이 제 자리를 찾고 싶어 한 것입니다.”
내 활약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렇다고 대군 앞에서 자랑할 수야 없지. 내가 천하무적이기는 해도 겸손할 줄도 알거든. 뒤에 서 있던 무영 역시 말없이 웃었다.
연암대군은 여섯 장의 그림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그림 속에서 고양이와 사슴, 호랑이와 까치, 물고기부터 모란과 붓, 서가의 책들이 들썩거렸지만, 연암대군과 무영은 여전히 보지 못한다.
“좌의정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병을 해체하기로 했네.”
“그럼, 성안으로 들어온 가짜 상인들은요?”
“요괴의 최면에 걸렸더군.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훈련을 잘 받은 이들이니 수비대에 자원했어. 노역으로 벌을 받겠다지만, 삯은 제대로 쳐주어야지.”
연암대군이 바라던 대로 아무도 다치지 않고 일을 끝냈다. 역시 성군이 될 자질이 있다. 귀한 그림을 찾았으니 당연히 세자가 되고, 다음 왕이 되겠지.
“위험이 다 사라진 건 아니다. 요괴들이 사방에 숨어있어. 너는 그걸 볼 수 있지. 정 화공.”
“예. 마마.”
“내 곁에 남아 나를 도와라.”
돕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아니 하늘보다 높지만 그럴 수 없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병원에 실려 간 내몸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여기에 살아있으니, 현실의 나도 멀쩡한 건 알겠지만.
사실 이 미션도 내가 선택한 건 아니잖아? 그 말은… 앞으로 다시 올 때에도 시간과 장소를 고를 수 없다는 뜻이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다음에는 몇 년이 지나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가 그림 속이고, 나는 그림 밖의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사람들에게는 여기가 현실이니까. 뭐라고 대답하나. 할 말을 찾으며 그림만 바라보았다.
순간, 여섯 장의 그림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벽이 커다란 스크린이 되더니 어딘가 다른 곳을 비춰주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넓은 강가에 나루터가 보였다. 돛단배가 세 척이나 떠 있고, 둔덕에서 나루터까지 십여 대의 수레가 줄지어 서 있었다. 배에서 수레까지 일꾼들이 가마니를 옮기고 있다. 꽤 무거워 보인다.
‘뭐지? 왜 이런 게 보여?’
쌀가마니 같은데? 가마니에는 어떤 글자가 찍혀있었다. 자세히 보니 ‘구휼’이라는 글자였다. 얼마 전에 북쪽으로 보냈다는 구휼미구나. 그런데 왜?
강가에는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공복을 입은 관리가 일꾼들을 지휘한다. 그들 뒤로 이정표가 보였다. 커다란 나무토막에 ‘평해’라고 쓰여 있다.
‘평해? 거긴 남쪽 끝이잖아?’
북쪽으로 보낸 구휼미가 왜? 설마… 구휼미를 훔친 거야? 그것도 관리가?
신묘한 그림이 보여줄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다. 여섯 장의 그림이 현덕 대사의 기운만 지키는 것이 아니었어. 위험을 알려주는 거야. 나라의 큰일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어! 그리고 그건 그림을 읽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대군을 도와야 해.’
구휼미 도난 사건까지 해결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어쩌지?
“정 화공!”
연암대군이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소리가 큰지 귀가 찌링 울렸다.
“지민아! 네 몸이!”
“예?”
내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투명해지고 있다. 놀라서 굳어진 연암대군의 얼굴이 보였고, 나를 잡으려고 뛰어오는 무영이 보였다.
어지럽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대로 어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