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 청년들이 ‘쉬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

일하고 싶지 착취당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by 이웃집 루시

요즘 20–30대 청년들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왜 요즘 청년들은 일을 안 하냐”는 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빠져 있다. '과연 청년들이 일을 하기 싫어서 쉬고 있는걸까?' 란 전제다.

현실은 다르다. 많은 청년들은 일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문장은 단순하다.



일하고 싶지 착취당하고 싶지 않다.


일자리는 있다, 그러나 살아갈 수 있는 일자리는 적다. 대한민국의 일자리 수는 통계상 줄어들지 않았다. 취업자 수는 유지되고 있고, 고용률 역시 급격히 붕괴된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일자리는 많은데 왜 안 하느냐”라고.

그러나 청년들이 마주하는 노동의 풍경은 통계와 다르다.


낮은 초임

불안정한 계약 형태

경력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직무

과도한 책임과 감정 노동


이런 조건의 일자리는 존재는 하지만, 선택하기엔 지나치게 가혹하다.

청년들에게 일자리는 더 이상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선택하는 순간, 삶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경험을 쌓아라”는 말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청년들은 수없이 들었다.


"처음엔 다 힘들다"

"다들 그렇게 버텼다"

"경험이 자산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경험’은 종종 이렇게 끝난다.


최저임금 이하의 보상

계약 종료 후 아무런 연결도 없는 경력

책임만 남고 권한은 없는 구조


청년들은 점점 깨닫는다. 이 경험은 성장이 아니라 소모라는 것을.

그리고 더 냉정한 사실도 마주한다.

이 구조는 민간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심지어 국가에서조차 기본급조차 받지 못하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다. 군대 얘기뿐만이 아니다. 공공의 이름 아래, 청년들은 ‘배움’과 ‘기회’라는 말로 포장된 채 무급·저임금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이때 청년들은 질문한다.


“이게 정말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첫 노동의 모습인가?”


쉬고 있는 청년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요즘 늘어나는 통계가 있다.


‘그냥 쉬고 있는 청년’.


이 표현은 마치 청년들이 아무 고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실제로 쉬고 있는 청년들의 머릿속은 오히려 너무 시끄럽다.


다시 도전해도 달라질 게 있을지

이 노동을 선택하면 몇 년 뒤 나는 어디에 있을지

지금 참고 버티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



이 질문들 앞에서 청년들은 잠시 멈춘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재정렬이다. 더 이상 착취를 ‘과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택,

번아웃 이후의 최소한의 자기 방어다.


노동이 삶을 무너뜨리는 순간, 선택지는 많지 않다


지금의 2030 세대는 일하면서 동시에 계산한다.


이 월급으로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지

병원 한 번 가는 게 부담이 되지 않는지

미래를 계획할 여유가 남는지


그리고 종종 결론에 이른다.


“이 일을 계속해도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 순간, 노동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버티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 어떤 청년들은 일한다.
그리고 어떤 청년들은 멈춘다.
그 차이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다.


청년들은 일하기 싫은 게 아니다.


이 문장은 꼭 다시 말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은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싶고

역할을 맡고 싶고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분명히 말한다.

일하고 싶지 착취당하고 싶지 않다. 노동이 삶을 파괴하지 않는 조건에서 일하고 싶다.

이 요구는 과하지 않다. 그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에 가깝다.


일자리가 늘었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


일자리는 숫자로 집계된다. 그러나 삶은 숫자로 유지되지 않는다.


오늘의 노동이 내일로 이어지는지

경력이 미래의 선택지를 넓혀주는지

최소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일자리는 청년들에게 존재해도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지금의 고용 시장은 이렇게 보인다. 고용은 유지되지만, 존엄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진 사회.


청년들이 쉬는 이유는 나약해서가 아니다. 노동을 거부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하고 싶지 착취당하고 싶지 않다.
이 말이 당연해질 때까지.







저 말은 사실 우리 아들이 한 말이다. 20대를 대표해서 한 말인가 싶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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