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석하게도 취미가 없다. 좋아해서 계속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남편과 노는 것이 유일하게 좋았으므로 오랜 시간 남편의 다양한 취미를 함께 해왔다. 휴일 중 하루 정도는 오매불망 딸을 기다리는 엄마와 시간을 보내다보면 금방 지나갔다. 남편과 휴일을 같이 보낼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시들해진 어느 주말, 스스로를 움직일 동력이 하나도 없는 껍데기 같은 나를 보며 피눈물이 났다.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일에 열정을 쏟아붓고 살았는데
좋아하는 힘이 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게 없나.
나는 지금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무기력에서 허우적거리다 발을 차며 벌떡 일어났다. '일단, 휴일에 할 일이 없는 게 너무 괴롭다. 무엇이라도 해보자.' 포털 검색창에 '취미'라고 검색했다. 어떤 분야도 주제도 없이 남들이 취미로 삼을 만한 걸 검색했다. 원데이클래스도 있지만 키트를 보내주면 혼자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다. 베이킹, 우드카빙, 자수, 그림그리기 등
한참을 검색하면서 우울해졌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자기 스트레스 달래는 취미, 재미있게 하는 취미 하나 없이 남들이 취미로 할만한 것이나 찾아보고 있자니 우울했다. 요가, 필라테스, 자전거, 줌바, 베이킹, 주말농장 등 해본 것도 많고 하면서 정말 즐겁기도 했고 꽤 잘한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우울과 무기력이 모두 덮어버리고 스스로 아무 것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완벽주의, 강박증, 우울증. 최근 미술심리상담 교육을 받으며 꽤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남편만 알고 있다. 이런 심리 상태가 언제 어떤 이유로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서 엄청난 분노가 일기도 하지만 일단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부분 해소가 된다. 고로 지금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
취미를 찾아보는 일은 일상의 불안을 줄이기 위함이다. 해야할 일이 정해져있지 않으면 휴일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지고 일요일이 되면 자괴감에 더욱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 내 마음에서 우러난 내가 정말 원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고 싶다.
* 하나하나 내 맘에 드는 재료를 사고 싶다.
이런 강박이 있는 내게 DIY 키트를 사는 일은 치욕스러운 일이나 다름 없다. 이걸 지키지 못하는 건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취향없는 매력없는 사람이 되는 것, 이런 걸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내가 그 편에 선다는 것이다. 다 필요없다. 나는 응급상황이고 DIY 키트는 불안을 잠재워주는 가장 효율적인 치료약이다.
10월 3째주 주말계획
1. 프랑스자수
우아하고 고상한 이미지로 여겨 내 관심 카테고리에 넣어본 적 없었으나 집에서 적은 돈으로 몰입하며 예쁜 결과물을 만든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나중에 옷이나 가방에 자수를 놓을 수 있다면 그도 좋겠다. 프랑스자수 키트를 시켰다.
2. 바크초콜릿
예전부터 만들고 싶었는데 선뜻 만들지 못했다. 식품 MD 일을 했었다보니 건강한 식재료를 사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서 키트의 초콜릿 스펙이 성에 차지 않았다. 좋은 초콜릿을 사자니 비싸고 처리도 복잡했다. 결국 못만들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 바크초콜릿 키트도 시켰다.
3. 라끌렛
집에 라끌렛 기구가 있다. 라끌렛이 맛있었지만 몇 년을 먹지 못했다. 이번엔 치즈가 맘에 들지 않았다. 가격과 스펙 사이에서 오가다가 지쳐서 포기했었다. 이번에는 적당히 아무거나 사서 먹기로 했다. 마켓컬리에서 치즈 몇 가지를 장바구니에 척척 담았다.
오늘 밤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