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무렵 갑자기 엄마가 많이 미웠다. 불안이 너무 커져서 일도 하기 어렵고 남편과 싸움도 잦아서 스스로를 돌아보던 중이었다. 불안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에 내내 엄마가 있었다. 함께 사는 내내 엄마는 나를 통제하고 억압했다. '사는 게 힘들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엄마가 희생한 덕분에 지금 내가 살 수 있지.' 그렇게 여기며 살아왔는데 엄마가 내게 심어준 불안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져버렸다. 미안한데 엄마가 밉다. 미워해서 미안하다.
미술심리상담 교육에서 인생의 첫 기억을 그려본 적이 있다. 내 첫 기억은 4~5살 무렵 엄마랑 바닥에 엎드려 '아이템풀' 학습지를 푸는데 틀렸다고 엄마한테 혼난 기억이다. 혼난 게 인생의 첫 기억이라니 씁쓸했다. 살면서 엄마한테 참 많이 맞았다. 어릴 땐 천방지축 스타일이었고 청소년이 되어서는 옳고 그름 따박따박 따지는 스타일이라 더 맞았다. 가난이 엄마의 심기를 건드려 애꿎은 내가 맞는 날도 있었다. 기침을 한다고 맞았으니까.
가난은 엄마를, 엄마는 나를 억압했다
우리 집은 항상 가난했다. IMF 때는 거리에 나 앉을 정도로 더 가난해졌다. 당시 나는 10살, 남동생은 8살이었다. 삶의 갈림길 앞에서 엄마는 살아내기로 했다. 엄마는 우릴 데리고 시골 할머니 댁 옆으로 내려왔고 아빠는 내려오지 못했다. 학교 수업 중에 엄마가 이사를 가야 한다고 나오라고 했다. 친구들과 인사도 못하고 그 길로 이사를 왔다. 벽에 검은곰팡이가 피고 천장에서 비가 새는 집이었다. 화장실은 푸세식 샤워실은 문이 없었다. 엄마는 이사 내려오자마자 김밥집에 일을 구했다. 그곳에서 3년 가족은 목숨을 부지했다.
나는 재능이 많은 아이였다. 무엇이든 시키면 잘했다. 고생하는 부모를 일찍이 인지하여 순종했고 그들의 자랑이고 싶었다. 부모 눈에 띈 나의 가장 큰 재능은 공부였다. 학원 보낼 돈은 없고 일하느라 공부를 봐줄 수도 없었던 엄마가 자식 교육을 위해 할 수 있었던 방법은 나를 단도리하는 것뿐이었다.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는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해."
친구네서 놀든 집에서 TV를 보든 나는 저녁 8시면 칭얼대는 동생을 데리고 공부방으로 갔다. 놀더라도 공부방에서 놀았다. 숙제를 하고 표준전과를 달달 외웠다. 전과는 새 학기마다 엄마가 사주던 유일한 학습서였다. 10시 좀 넘으면 엄마가 돌아왔던 것 같다. 설거지하는 엄마 옆에 서서 학교에서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선생님께 무슨 칭찬을 받았는지, 엄마를 위해 집안일을 얼마나 해두었는지 조잘거렸다. 피곤한 엄마는 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때, 내 마음은 다 쪼그라든 것 같아
부모님의 부단한 노력으로 6학년 2학기 인천으로 올라왔다. 기쁘게도 전학 온 학교는 중간고사를 이미 봤다고 했다. (이전 학교는 중간고사 전이었는데!) 엄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간고사를 보게 해달라고 하여 전학 온 첫날 교무실에서 시험을 봤다. 시험 결과 반 3등. 전까지 동물원 원숭이 보듯 시골 촌년을 신기하게 보던 아이들은 대차게 왕따를 시켰다.
엄마는 인천에 와서도 김밥집에서 일을 했다. 그때도 설거지하는 엄마 옆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괴롭힘 당한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답변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별 얘기 안 했던 것 같다. 지금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면 괴롭힘이 유치한 수준이긴 하다. 엄마도 짓궂은 애들 장난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당시 이정현의 '너'가 유행이었는데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
드디어 졸업식. 괴롭히던 아이들과 다른 중학교에 배정되어 나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한 학기였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상도 몇 개 받아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울었다. 애들 못 키워낼까 봐 무서웠는데 초등학교 졸업을 시켰다고, 6년 동안 학교를 5군데 옮기면서도 개근시키겠다고 날짜 꼬박꼬박 맞춰서 보냈다고 울었다. 개근상이 엄마 몫임을 알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엄마는 일을 나가지 않았다. 그때부터 엄마는 본격적으로 나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나의 사춘기와 맞물려 전쟁이 시작되었다.
억압당했던 아이의 20년 뒤 분노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