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 Nov 17. 2020

억압당했던 아이의 20년 뒤 분노 (下)

'억압당했던 아이의 20년 뒤 분노' 하편에는 중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적으려 했다. 몇 자 적는데 고통스러웠다.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지만 적고 보니 글 속에 엄마가 아주 내 인생을 망쳐버린 것 같다. 내가 다른 맥락에서 글을 쓴다면 엄마는 대단한 위인이었을 텐데. 애증의 관계 모녀지간을 '증'의 시각으로만 적어서 내 기억에 박아두는 것 같아서 지웠다.


지난주 화요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급격한 심경의 변화를 겪으며 상편을 적을 때와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다. 엄마에 대한 감정이 '증'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적기로 한다.


빨간 머리에 지프차를 모는 탐험가

미술 심리상담 교육에서 신체 본뜨기 작업을 하게 되었다. 팀에서 주인공을 정하여 그 사람의 몸을 본뜨고 주인공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꾸며주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머리는 노랗게 칠해주세요. 아름다운 공주 드레스를 입혀주세요 주문하면 팀원들이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그대로 꾸며주는 것이다.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


무한한 자유 속에서 나는 하나의 모습을 정해야 했다. 막막하던 중에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용맹하게 정글을 헤쳐나가는
탐험가를 그려주세요.

몸 보다 큰 종이 위에 누워 아주 당당한 포즈를 취했다. 검지를 펴서 팔을 사선 위로 쭉 뻗어 가야 할 곳을 가리키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본을 뜬 후 일어나 보니 그림 속의 내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듯했다.


머리는 무슨 색으로 칠할까요? 옷은 어떤 스타일로 하실 거예요? 신발은요? 색깔은요? 정글인데 무기도 하나 있어야겠죠? 모자도 씌워드릴까요? 온갖 질문 러쉬에 생각하느라 바빴다. 현실이었으면 모든 질문에 답은 '아무거나' 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거나'라는 건 없다. 좋든 싫든 내가 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왕 정하는 거 현실에서는 쉽게 못하는 결정을 해보자.


머리는 빨간색이요. 옷은 탐험가 옷이요. 주머니 많은 조끼가 좋겠어요. 신발은 워커요. 머리 색이랑 맞춰서 빨간색 좋겠네요. 무기 좋아요. 수류탄, 칼 좋네요. 모자 좋아요. 빨간색 머리엔 파란 모자죠. 벨트도 하나 찰까요? 선글라스도 하나 쓰죠.


내 모습이 완성되어 갈 때쯤 뒤에 큰 지프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원 분들이 힘들어하지 않으실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지프차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부탁드렸다.


배경에 큰 지프차가 한 대 있으면 좋겠어요.

참 자아 True self

팀원 분들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찾아가며 지프차를 그리시는 동안 나는 노끈으로 타잔이 타고 다니는 나뭇가지를 넌출넌출 붙였다. 정글이면 꼭 저런 걸 손으로 걷으면서 가야 할 것 같아서. 발 밑에는 색색의 불빛이 퐁퐁 날아다니는 신비로운 풀밭이 펼쳐졌다.


여자 키가 153이니 적어도 세로로 2미터 사이즈의 그림이다


6개월 동안 미술심리상담 교육을 받으면서 신기하다고 느낀 게 있다. 나는 별 거 아닌 평범한 걸 그렸다고, 남들도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다른 사람들 그림 보면 진짜 상상 초월하게 다르다. 그냥 이런 게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뭐 하나 그려 넣어도, 별 생각하지 않고 색깔을 집어 들어도 완성된 그림을 들여다보면 무의식이 묻어있다.


그림 속의 나는 자유롭고 활기차고 용맹하기 그지없다. 스스로를 무기력하고 호롱불처럼 은은하면서도 바람 앞에 위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눈물이 났다. 강의해주신 선생님께서 그러셨다. 오늘 당신의 참 자아를 찾은 것 같다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사회가 바라는 대로 성실하게 사느라 참 자아가 억눌려 많이 힘들었겠다고.


돌이켜보면 내가 은은하게 살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아주 강력한 에너지를 분출하며 살았다. 10대 때는 악착같이 공부했다. 나의 강한 승부욕이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쭉쭉 달려 주었다. 20대에는 이제 내 인생 살아보겠다며 부모가 하라는 건 다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 했다. 꿈을 찾겠다고 연신 맨 땅에 헤딩하며 살았다. 직업도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했다. 직장생활 10년 간 업을 4번 바꾸었으니. 하지만, 이번엔 나의 성공과 회사의 성공을 동일시하여 나를 갈아 넣으며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렸다.


내 참 자아 힘내!

20년 헤딩하고 쏟아붓고 난리를 치다 이제 힘이 똑 떨어졌나 보다. 근래 3년은 아주 매가리없이 살았다. 원래 이렇게 약한 사람인데 남의 기대에 맞춰 악착같이 사느라 고생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자기 연민도, 부모 원망도 강해지게 했다. 원래 강한 사람인데 번아웃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참 자아의 모습은 큰 위로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문제를 그림 속의 나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조금 더 보살피고 힘을 조금 더 채우면 그림 속의 내가 진짜 내가 될 것 같다. 사실 이걸 안 순간부터 그림 속의 내가 된 것 같다.



억압당했던 아이의 20년 뒤 분노 (下)

작가의 이전글 억압당했던 아이의 20년 뒤 분노 (上)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