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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Sep 29. 2021

시인은 우리 내부에 있다



어젯밤 여름의 끝에 고심한 시가 표지가 새까만 시집에 담겨서 왔다. 우울이라는 주제로 헤쳐 모여 서로 살을 맞대고 있어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밀하게 다르다. 이 시집을 기획, 발행한 편집자님은 우리가 당신의 우울을 감히 헤아릴 순 없어도 안부는 묻고 싶다고 서문에 밝혔다.


작가들의 인세를 모아 모두 기부하는 이 프로젝트 시집에 작품을 낸 것이 세 번, 운이 좋아서 세 번 모두 작품을 실었다. 영원에 <나방>, 목소리에 <별별소리>, 그리고 이번의 우울에 <공동묘지 덕수궁>까지 받고 나니 2021년이 얼마 안 남은 이 시점에 올해가 마무리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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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은 영감이 어떤 형태로 다가오느냐에 따라 운문적 인간과 산문적 인간으로 나뉜다. 나는 내 스스로를 산문적 인간으로 규정한다. 내가 끈기를 가지고 시간을 가장 많이 들이는 글은 모두 에세이나 소설이었다. 왜 운문이 아니라 산문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으나 그 이유는 알 수 없어 타고난 기질 덕분이 아닐까하는 다소 무책임한 답변만 내려놓은 상태이다.


시를 잘 쓰고 싶다는 욕심까지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시를 아예 놓을 순 없었다. 시집에 실린 두 편의 시 <나방>과 <별별소리>는 한 때 시라고 말하기도 망설여지는 조악한 메모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메모를 몇 년간 간직해온 것은 갑자기 섬광처럼 번뜩이며 머릿속을 관통했던 영감의 순간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비록 표현은 부실할 지언정 아이디어는 시적인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품이 되고 도서 번호를 부여받아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음에도.


가장 최근 시리즈인 '우울'에 발표된 <공동묘지 덕수궁>은 이전보다 시쓰는 의식이 상승했음을 보여주기에 마지막 권을 읽으며 작은 성취감을 맛보았다. 시 쓰는 마음의 층위가 한 계단 올라간 덕분인지 이전의 시를 보면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점에서 성장했는지 이제는 보인다. 시들이 당시에 그 상태로 최선이었던 것은 내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홀로 이야기한다. 그 수준에선 아무리 뛰어봤자 이만큼까지 밖에 볼 수 없었노라고.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방>, <별별소리> 사이에 도약을 이루어 <공동묘지 덕수궁>이 나왔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목적있는 탐구’ 덕분이다. 나방과 별별소리는 내가 마음에서 떠오르는 시상을 쓸 데없는 상념으로 치부하던 시기에 나왔고, 공동묘지 덕수궁은 그 상념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이후에 나온 작품이다. 작년 말부터 내게 닥치는 정념과 아이디어를 한낱 몽상가의 감정기복 정도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만의 예술 세계를 탐구하기로 스스로 결정했고, 그 모호한 탐구라는 것은 내가 본능적으로 쓰고 싶은 글을 그냥 마음껏 써 보는 것이었다.


 자신이 뛰어난 시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떤 ,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생각과 차원이 다른 쓸쓸함이 마음에 어떤 예고도 없이 부딪쳐  교통사고를 내는 날이면 시를   밖에 없었다. 공동묘지 덕수궁도 그런 날에 탄생했고, 이상하게도 혼수상태에 오래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 삶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환자처럼  글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독립출판사 파도는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이 프로젝트 시집을 기획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소설이나 에세이에 비해 시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이 극히 적다보니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꽤 되는 것 같다.

https://www.instagram.com/seeyourseabooks


무엇보다도 시집을 읽다보면 이름을 알리지 않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꼭꼭 숨어서 몰래 시를 쓰는 건지 궁금해진다. 이들에게 시가 단지 취미인지 그 이상의 열정인지는 몰라도 사회에서 어떤 가면을 쓰고 자신의 참된 자아를 숨기고 있음엔 틀림없다.


우리가 힘든 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권위 아래서 예기치 못하게 불쑥 찾아오는 시상과 정념에 휩싸일 자유를 내던지고 살아간다. 시인들이 당장 눈 앞에 보이진 않더라도 그들은 시집 속에서 자신은 어딘가에서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고 비밀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떤 날은 퇴근 시간에 사람 많은 길거리를 지나면서 생각하기도 했다. 이 중 어딘가에 시인이 있다. 우리 안에 시인이 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도 시인이 있을 것임을 안다. 때때로 비밀신호를 읽으며, 혹은 시인이 우리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한번 더 시를 써봐도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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