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카드 트래블 라이브러리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굳이 찾으러 다녀야 할 어려운 말이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말이라는 이금희의 라디오 멘트를 들으며 나는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잘 달래지 못한 지난 주가 끝나고 운 좋게 추석을 맞이했으나 그 중의 절반도 잦은 이동과 약간의 명절 노동으로 살짝 피로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주말을 간절하게 기다리기도 했고,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에 대해서 고찰한 후 마음을 달리 먹기로 결심하기도 했기에 이에 상응하는 어떤 소규모 여행이나 나들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오늘 나는 28세의 청년으로서 선언문 하나를 작성했는데, 먼저 이 지극히 개인적인 선언문이 작성된 장소가 어디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현대카드는 문화 마케팅의 일환으로 주제별 문화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태원에 있는 뮤직 라이브러리, 종로에 있는 디자인 라이브러리, 강남 신사동에 있는 쿠킹 라이브러리와 같은 곳이다. 이 공간들은 현대카드 소지자가 아니어도 입장할 수는 있으나 모든 공간을 다 둘러볼 수는 없다. 1층 정도까지만 구경이 가능하고 현대카드 회원은 나머지 2층, 3층을 다 구경할 수 있는 구조이다. 사실 별 소비도 안하는 나는 현대카드를 이태원의 뮤직 라이브러리에서 LP를 듣겠다는 일념 하나로 만들었다. 오늘 내가 다녀온 곳은 압구정로데오역 근처에 있는 트래블 라이브러리이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여행이라는 테마에 맞춘 디자인과 소품들 덕분에 기분이 절로 들뜨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특히 제일 하이라이트격인 공간은 전 세계 주요 나라와 도시의 지도를 한 곳에 모아놓은 대형 캐비닛이다.
이 캐비닛 안에는 여러가지 테마에 맞춘 지도 여러가지를 큐레이션 해주고 있다. 이 공간 자체는 크지 않은데 양 쪽에 거울이 있는 바람에 사진을 찍어 놓으면 매우 넓어 보인다. 대단한 여행가는 아니지만 기분 전환으로 여행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잠시 기쁨에 겨워 지도를 골랐다. 원래는 모르는 도시를 좀 살펴볼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인데 막상 집어든 지도는 이미 다녀온 도시이거나 내 친구들이 살아서 심적으로 가까운 도시였다. 지도를 펼치니 장소 이름을 따라 기억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또 한번 추억팔이가 시작되었다.
트래블 라이브러리에 대한 소개글을 봤을 때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해서 내심 기대를 덜(?)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을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없기에 여유롭게 공간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이 공간이 단지 여행만을 주제로 했다면 아마 그렇게 매력이 있진 않았을 텐데 이름은 트래블 라이브러리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이 공간은 여행은 물론 문학과 예술 전반에 관한 무드를 느끼기에도 적합하다. 1층의 북카페 공간의 이름이 ‘문학살롱 초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진짜 문학살롱스러운 모습은 1층보다도 그 위층에 진열되어 있었다.
책 도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2층에는 가방을 들고 올라갈 수 없다. 계단을 올라가면 예술가의 서재를 모티프로 만든 듯한 책장이 바닥을 제외한 온 사방에 깔려있다. 엄선된 공간에 몇 개 놓여진 테이블이 멋스럽고 특히 테이블마다 갖추어져 있는 저 스탠드가 창작의 욕망을 자극한다.
2층에도 여행에 대한 테마를 상기시키려고 여행을 계획하라는 취지의 작은 공간을 넣어 두었다. 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이 작은 공간엔 파리와 제주도의 백지도와 연필 등을 제공하며 그 주변에 클래식한 사진기, 폴라로이드 사진, 티켓, 여권 등의 소품을 전시해두었다.
공간을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여행이란 문학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예술과 서로 영감을 주고 받으며 분리될 수 없는 혼연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하고 되새김질을 하는데 그러다가 나는 나를 위해 딱 그 자리에 존재하는 듯한 책상 하나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이 책상의 전체 모습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나는 여기에 앉아 선언문 쓰기에 돌입했다. 이 책상은 직사각형으로 넓은데다가 큰 스탠드 아래에 백지와 잘 깎은 연필, 책갈피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들고 온 노트가 굳이 필요 없었다. 오늘의 이 메모를 '선언문'이라고 다소 과장된 이름으로 부른 것은 부드럽게 뜯어낸 백지 한 장에 연필로 눌러쓰는 느낌이 매일 기록하는 노트에 펜으로 휘갈겨 쓰는 감촉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문학 살롱이 주는 분위기와 여행에 대한 향수가 감상적인 기록말고 색다른 무언가를 적어내기를 요구했다. 스탠드 아래 연필이 드리운 긴 그림자를 오랜만에 반기며 나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순식간에 써내려갔다.
나 김민주, 28세의 9월 가을 선언
나 김민주는 인생의 단 하루도 헛되이 쓰지 않고 충만하게 살 것임을 선언한다. 2016년 타이페이의 용산사에서 본 흔들리는 촛불과 그에 겹쳤던 형상을 절대 잊지 않고 보란듯이 살아갈 것이다.
나 김민주는 이 사회가 아무리 내 존재와 꿈을 초라하게 만들어도 그에 굴하지 않고 내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임을 선언한다. 고난과 역경에 때론 회의하고 멈추고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내 꿈 자체를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임을 선언한다.
나 김민주는 나의 일상이 얼마나 많은 운과 누군가의 노력으로 빚어진 것임을 잊지 않고, 감사함을 모르거나 불평을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대가들은 절대 연장을 탓하지 않으며 연습과 노력으로 장애물을 극복했기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나 김민주는 연습과 노력을 평생 게을리하지 않고 내 생애 전체를 배우는 데 바칠 것을 선언한다. 그리하여 이 수명이 다하는 날 인생의 모든 날들을 사랑하고 매 순간 열정을 다했노라고 스스로 수고했다 칭찬하며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 김민주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작은 것과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언제나 기억할 것을 선언한다.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나의 가족과 친구가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임을 숙지하고 이들과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이들의 자랑스러운 딸, 언니, 친구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나 김민주는 초극하는 인간으로서 진보와 자유를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노력없는 성과는 없고 위험없는 모험이란 없음을 알고 초월을 위해 한 발 더 내딛을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2021년 9월 25일 토요일 4시 16분에.
내가 이 선언문을 미리 생각이라도 해둔 듯이 단숨에 써내려간 것은 금희 언니의 말대로 이 말이 이미 내 가슴 속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오늘 하루의 나머지 순간을 충만하게 살기 위해 곧 운동을 하러 나갈 것이다. 한번 뿐인 28세의 가을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