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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Sep 18. 2021

일주일이 7일인 이유


나와 친구들은 20대의 끝에서 저마다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20대가 이제 자신도 끝물이라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번엔 아무리 기술을 걸어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는 문제와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는 갖가지 기술을 구사했는데 도망치기, 욕하기, 여행가기, 울기, 무시하기, 정신 승리하기 등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이런 시시한 것들을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좀 의문스럽다. 그 문제들 중에선 해결되지 않고 잊히거나 묻힌 것들도 있기에 그런 것을 두고 이겼다고 말하기에도 뭔가 껄쩍지근한 면도 있다. 그보다 매번 문제들에게 다양한 처세술을 구사해 그 상황을 모면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겠다.


20대 초반도, 중반도 아닌 20대 후반의 나이 정도면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어느 정도는 맺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결실도 사람마다 정의가 제각각이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내 주변엔 자신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귀하다. 아직도 방황하고 고뇌하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는 어떤 친구들은 애초에 결실을 맺는 것이 가능은 할런지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중이든 이미 한 상태이든 어느 정도 내가 할 만큼은 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더 많은 것을 해야만 하는 시대가 와버렸다. 취업도 큰 난관인데 막상 취업을 해도 거기서 멈출 수가 없다. 직장 생활은 아무리 엿 같아도 미래를 위해 이 악물고 버텨야 하며, 그 와중에 자기 계발을 해야한다고도 하고, 또 이젠 저금만으로는 부가 축적되지 않으니 재테크를 해야한다고도 한다.


다 맞는 말이고, 그 필요성을 모르는 바도 아니나 참 피곤스럽기 짝이 없다. 저 세 가지 모두는 에너지를 크게 요하는 일이라 더욱이 공부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것들을 병행하기란 너무도 힘든 일이다. 어찌 됐건 퇴근 후에(혹은 공부 후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무언가를 부가적인 노력을 하기로 결심을 하지만 그 의지가 보통 3일만에 사그라드는 현상에 늘 도돌이표처럼 고뇌하는 나와 친구들은 어찌 조상들은 '작심삼일'이라는 적절한 단어를 만들어냈는지, 특히 1일도 2일도 아니고 3일이라는 순간을 포착했다는 사실에 경탄을 했다.


20대가 끝나간다는 사실에 퍽 심취해있던 나는 틈만 나면 20대도 끝물인데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놀 수 있을 때 놀아야 한다는 다소 세기말적인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제철 과일이라는 권위를 갖고 생과일 애호가인 나와 매 시즌 과일잼 메이커인 그 친구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바로 '복숭아'였다. 복숭아를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심정으로 먹어야 한다는 내 주장을 듣던 친구는 복숭아가 대중적인 과일인 것에 비해 왜 복숭아 나무는 정원수로서 찾아보기가 어려울까 하는 질문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그 제철성 질문을 반가워 하며 우선 나는 복숭아 나무가 정원수로서 관리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하는 가설을 던졌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 정원 딸린 주택 영상을 찾아보는 이 친구에 의해서 별 힘을 들이지 않고 폐기되었다. 그녀는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 관련 영상을 자주 보는데, 서양권 나라의 주택 정원엔 복숭아 나무가 흔하게 심어져 있는 것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과실나무처럼 특별히 심기 어렵다거나 많은 관리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한국에선 복숭아는 그 명성에 비해 나무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지 의구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고보니 한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 복숭아가 가지는 의미는 그냥 제철 과일 이상이지 않던가. 신선 세계를 묘사할 때 매번 나오는 소품이 복숭아 나무나 도화꽃이고 동양의 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작품, 삼국지 속에서도 그 ‘도원결의’란 것이 복숭아 나무 아래서 일어난 작당모의 아니던가?


나와 친구는 복숭아가 천상 세계를 상징하는 과일임을 상기하다가 이런 신성한 나무를 감히 더러운 인간계(?)에 심는 것이 불경스러운 행위로 간주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지 두번째 가설을 내놓았다. 이것을 확인할 방도는 딱히 없었고 친구는 주변 어른에게서 복숭아 나무는 집에 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다며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선 '복숭아나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복숭아나무와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고 믿어왔다. 따라서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심는 것을 금기하였으며, 제상에도 복숭아를 올리지 않았다. 이것은 조상신이 찾아와도 복숭아가 지닌 축귀의 힘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제사 올린 것도 응감(應感)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복숭아나무)]



백과사전에 따르면 철저히 제사 때문인 것처럼 서술해놓았는데, 우리는 저 설명에는 개인적으로 별로 동의하지 않았다. 천상의 복숭아 나무가 이 혼돈스러운 인간 세계에 애시당초 어울리지도 않아 심지도 않았던 것이라고 제철성 질문에 대한 답을 마음대로 떠들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복숭아 나무 아래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미래를 도모했던 삼국지 속 도원결의란 정말 소설이라서 가능했던 것인지 잠깐 회의가 들었다. 나는 도원결의라는 단어의 비장미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다, 요즘 같이 개인이 단절되고 고립된 사회에선 서로를 격려하는 도원결의야 말로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로망스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작심이 삼일도 겨우 가는 이 세상에 복숭아 나무 한 그루조차 없다면 도대체 도원결의는 어디서 하나?


나는 친구와 함께 아무리 그래도 이 넓은 세상에 어디 한 그루 쯤은 복숭아 나무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한번 찾아보자고 했다. 도원결의가 일어난 삼국지 속 복숭아 동산도 흔한 장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흔한 장소였다면 거기서 그 중대한 작당모의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복숭아 나무가 만약 없다면 사과 나무든 무슨 나무든 복숭아 나무 대타를 정하자고도 했다. 할 것은 많고 시간과 에너지는 부족한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것은 도원결의의 으쌰으쌰임을 절감한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일주일이 왜 7일인지를 설명할 공식 하나를 떠올렸다. 원래 일주일을 7일로 묶는 것은 순전히 유럽 문화권에서 유래된 관습이지 동양에서는 한 주를 7일로 묶는 전통이 없었다. 하지만 7일이 일주일이 된 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정착된지 오래된 바, 일주일이 7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보다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를 풀이해보고자 한 것이다.


작심삼일+작심삼일+도원결의=3+3+1=7


첫번째 작심은 삼일만에 끝나고, 또 자존심은 있어서 이대로 끝낼 순 없다고 바로 두번째 작심을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삼일만에 끝나버렸기에 절망을 하다가 하루 쯤은 누군가를 만나 도원결의를 하며 다시 작심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 힘들지만 해야할 것을 하며, 작심삼일이라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기 보다는 삼일이 끝나면 다시 작심을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그 끝없는 작심삼일을 위해 일주일에 한번쯤은 뜻을 함께할 사람들과의 도원결의가 필요하다.


그날 밤도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고서 글을 쓰다 잠들었다. 그 날은 일요일 밤이었고, 바로 다음날부터 새로운 작심삼일과 함께 한 주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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