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안 쓴지도 한 달이 넘었다니, 과연 내가 변하긴 변했다 싶다. 처음에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동기는 아마 다른 분들과 비슷할 것이라 짐작한다. 일종의 한풀이랄까? 내게 에세이란 내면에 차오르는 스트레스를 음악, 산책, 영화, 여타 다른 것으로 모두 게워낼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최후의 보루다. 근데 이 글쓰기라는 것도 참 진상스럽기 짝이 없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시작하지만 막상 시작을 하면 스트레스를 도리어 주는 이것! 쓰기 전엔 막연하고 쓰고 나면 진부해서 짜증이 나는데 안 할 수도 없는 것. 음악, 움직임, 영화, 음식 등 다른 것으로 해소가 될 것이라면 애초에 글쓰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진상들에 대해서 한풀이 한번 하려고 한다.
'진상'이라는 단어는 다분히 관용적이고, 어느 때는 가벼운 유머로 소비되기도 한다. 언제부터 진상이라는 단어가 대두되어서 내 일상 단어집에 추가되었나 곰곰이 돌이켜봤다. 내 기억으로 진상이라는 단어는 '손님'과 함께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여기서 손님이라는 맥락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내가 이해하는 진상이라는 단어가, 그 진상이 손님일 때 발생하는 상황에서 그 진가를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진상 손님을 받는 점주에게 우리가 이입해본다면, 그 상황은 치욕스러워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다. 부당한 요구를 보무도 당당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나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음을 진상은 상기시킨다. 그리고 내 처지가 그 하찮은 인간에게 이리저리 휘둘릴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난 그에게 어떠한 항거를 할 수 없이 그 요구를 들어줘야만 한다. 이런 상황은 정도만 다를 뿐 사회 생활 내 여러 관계로 치환된다. 진상 상사, 진상 동료, 진상 선생 ….
하지만 우리에게 정작 제일 상처가 되는 건 가족과 친구 간을 파고드는 진상스러움이 아닐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회 생활에서 일어나는 진상이야 원래 먹고 사는 게 다 그렇다며 친구와 술과 매운 안주 한 조각에 털어내고 그 인간들에게 기대를 더이상 안한다고 쳐도 말이다. 가족과 친구는 그렇게 단박에 털어낼 수가 없다. 진상은 도처에 존재해서 하나를 꼽기가 좀 어렵긴 한데, 이번에 엄선된 이 진상은 나와 내 가까운 사람들이 최근에 겪은 일이다.
첫번째로 가족들에게서 (여기서 가족이란 과거엔 가족으로 묶였으나 현대 사회에선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어버린 혈연관계까지 포함한 광의적 개념이다.)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 때이다. 혹은 '니가 편하니까 그런 거다'라는 대체적 표현도 존재하는데 이런 말은 대체로 '그럼 내가 안하면 아무도 안하면 되겠네?'라는 질문을 내가 던질 경우 상대방은 한사코 그럴 순 없다며 반대를 하는 그런 가족 내 일에서 발생한다. 어렵게 돌려 말해서 무엇 하리. 하기는 해야겠지만 내가 하기는 싫고, 그러니까 니가 좀 해줬으면 하는 그런 일이다. 어찌됐건 일은 해야만 하기에 누군가에게 돌아가게 되어있다. 어떤 사람이냐면, 마음이 제일 약해서 '니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라는 무책임한 강요에 결국 넘어가주는 사람이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가족이니까 해줄 수 있다고 가족애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경험상 이런 일의 99프로는 실컷 발휘한 가족애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회 생활에서도 그렇듯 이런 일은 잘 해봐야 본전이고, 괜히 떠맡았다가 못할 경우 욕이나 들어먹기 때문이다. 고맙다고 생각도 안한다. 그렇지만 지금 한번 이 일을 내가 맡았기 때문에 다음번도 당연히 내가 하는 걸로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해버린다.
두번째는 친구 혹은 애인 간의 연락 논쟁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연락을 먼저 하는 부류와 절대 먼저 하지는 않는 부류, 답장을 하는 빈도와 그 시간의 간격이 문제가 된다. 누구는 관심과 애정의 문제라고 하고, 누구는 타고난 성향의 문제라고 한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연락 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 하는 문제라고나 할까. 나에게도 잠수를 타는 친구가 몇 있다. 잠수란 것도 어느 정도인지 사람마다 달라서 구체적으로 서술해보자면, 어느날 갑자기 쎄한 느낌이 들어 전화를 걸면 없는 전화번호라는 알림음이 대신 반겨주는 경우도 있고, 답장이 3달만에 오는 친구도 있으며, 그나마 가장 양호한 내 잠수부 친구에게선 3일 후에 답장을 받았다. 여기서 잠수란 이야기가 한창 활발히 오다가 이야기 소재가 고갈되어 자연스럽게 대화가 사그라드는 순간을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앞에서 내가 기술한 저 경우 모두 아주 오랜만에 안부를 묻기 위해서 내가 먼저 연락을 했는데 친구들의 반응이 저랬다. 사실 전화번호까지 삭제해버린 그 친구의 경우 주변 사람들이 묻기도 했다. 넌 왜 그 친구와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거니. 애초에 지금 연락 수단도 끊긴 마당에 친구 관계가 유지된다고 볼 순 있긴 한 거니.
얼마 전 98년생 김지영이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게 고민을 토로했다. 극단적 개인주의자인 98년생 김지영은 웬만하면 자신의 속을 가족을 포함한 타인에게 털어놓는 일이 없으므로, 그녀가 뭔가 말을 했다하면 그것은 보통 이상의 분노 게이지가 차올랐다는 뜻이다. 김지영에게도 프리 다이빙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의 잠수는 길게는 몇 년, 몇 달이 걸렸고 최근에 연락이 되어 또 잘 지내기도 했으나 이번에 또 말도 없이 잠수를 탔다. 김지영의 질문은 고민 들어주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연처럼 간단 명료하게 기술할 수 있다.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할까요? 고민 들어주는 프로그램에선 고민을 들은 패널들이 충고를 해주면서 사연이 끝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내가 말해줄 수 없는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다고 했다. 그 친구와 다시 연락이 재개된다고 해도 그 친구는 앞으로도 계속 잠수를 탈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김지영은 이어서 그 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있으며, 그 남자친구에겐 분명 이렇게 잠수를 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부터 사귀었다고 했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그 남자친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잠수 연락을 했다면 그렇게 오래 사귀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 다이빙도 모두에게 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대를 봐가면서 하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다. 김지영은 뒤이어서 내게 물었다. 언니야는 왜 그 사람들이랑 계속 친구를 하는 거야?
김지영의 사연과 질문으로 새삼스럽게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내가 그 다이버들과 아직도 친구 사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누구에겐 정성스럽게 답하고 나에게만 잠수를 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와도 연락하고 싶지 않은 시기가 왔나보다, 하고 마음 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넘어갔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오고, 나도 한 때는 다이브한 채로 한동안 지내본 적이 있으므로. 문제는 그럼 내 친애하는 잠수부들은 모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잠수를 하는 스타일이었냐 하면,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김지영의 친구처럼 나에겐 잠수를 타지만 다른 이들과는 연락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친구들이 나에게도 몇 있었다. 하지만 나는 김지영과 대화를 하기 전까지 잠수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그들 모두를 잠수부라고 한데 뭉뚱그려놓고 살았다. 나는 잠수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그럴리가. 최근 몇 개월간 기분이 끔찍하게 오르락 내리락 했던 건 사실 그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 메시지의 1은 아직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 다른 사람의 피드에는 등장하고 있는 다이버들을 내가 봤을 때부터.
나는 그 순간들을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규정하며 그냥 넘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대응 방식이 좋은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이런 일을 겪기 전까진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연락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참 구질구질하지 않나? 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그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난 그걸 알아 들으면 되고. 하지만 이 다이버들의 선택적 잠수에 대해서 아직 나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바빠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진 것인 줄 알았는데 내 연락만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 이유를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할 때. 이런 경우에도 나는 그들에게 계속 연락을 시도해야 하는건지, 침묵인지 무관심인지 모를 잠잠한 수면을 보며 우리가 아직도 여전한지 되짚어보는 날들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아마 여기까지만 깨달았다면 나는 오늘 이 글을 완성해서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해줄 어떤 상념은 가장 최근에 일었다.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해오는 어떤 친구들이 있다. 그것도 열렬히, 사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감사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연락에 어떤 날은 그 메시지를 보고도 바로 답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온 지 며칠이나 된 메시지에 답장을 하면서 깨달았다. 내 주된 연락 채널은 아니었어도 알림이 왔으니 못 본 것도 아닌데 나중에 해야지, 라고 생각하거나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그 순간을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진상의 행위를 개탄하며 이렇게 길게 서술까지 해놓고선, 알고보니 나도 똑같은 짓을 누군가에게는 하고 있었다는 건데 이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다. 도대체 나는 왜 누군가에겐 답장이 오지 않거나 답장이 느린 것에 슬퍼했으나, 왜 누군가에게는 그들처럼 똑같이 답장을 바로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이 모든 진상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예의로 귀결된다는 하나의 진리는 진상 그 자체를 넘어 그 잔상이 어디까지 미치는 지도 환하게 밝혀냈다. 난 왜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선연락에 바로 감사해하며 답장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내가 잠수부 친구들의 선택적 잠수에 슬퍼했던 이유와 같다. 내가 연락이 늦든 잠수를 타든, 언제든 내가 연락하면 그 자리에서 나를 받아줄 것을 알기에, 그래서 나는 답을 미루었다. 나중에 해도 되니까. 그리고 친구들의 선택적 잠수에도 이와 정확히 동일한 이유로 슬퍼했다. 내 요구 안 들어주면 평점 테러하겠다는 진상 손님이든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가족이든 본질은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 상대가 결국 받아줄 것임을 알고 그러는 것이다. 각자 다른 상대에게 잠수하고 잠수 당한다.
내 안에 진상의 잔상이 보인다. 진상들이 그렇게 싫었으면서도, 나또한 어떤 이에게 그러고 살고 있다. 그리고 내 친애하는 잠수부들이 나에게만 선택적으로 잠수하는 것도, 이젠 그 이유가 나의 어떤 면모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이런 면모겠지. 내 안에 있는 진상. 내가 어떠한 화도 내지 않고, 관계 단절도 하지 않고 모든 연락 불통들을 살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외면 아래 묻어둔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 되었다. 화를 내거나 관계 중단을 선언할 권리가 그들에게도 없지만 나에게도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들이 프리 다이버라고 생각하기 보다 우리 사이가 심해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이전의 우리가 서로에게 연락하고 답장하고, 그리고 그 기본적인 것을 서로 고마워했던 넉넉한 여유가 사라지다 보니 부력이 줄어들었다. 어떤 진상스러움이 우리 사이에 달라붙은 후 우리 사이가 무거워져 침잠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그런 예의들이 휘발되어 당신과 나 사이의 여유 공간은 줄어 들었다. 남은 것은 진상스러움으로 환원되었을 뿐이다. 무게는 그대로인데 우리 사이의 부피가 줄어들어서 가라앉았다.
나는 대체로 긍정적인 결말을 내는 사람인데, 이번엔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다. 바다는 너무 깊고도 넓으니 그 곳으로의 잠수는 도대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어떤 사이는 그대로 잠수해 영영 다시 떠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 그냥 바다 속 어딘가에 묻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이는, 글쎄. 어떤 타이밍에 그와 내가 동시에 숨을 불어 넣는다면 두둥실 떠오를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시기가 올 지 아닐 지도 현재로썬 알 수 없지만 난 잠수부들을 계속 친애하기로 했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이 바다 속에서 내 안에 비쳐보이는 진상의 잔상을 지우는 것부터 시급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