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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Jul 08. 2021

얼죽아 마시다가 얼어죽은 사람


살아오는 내내 나는 세상과 불화가 있었다.


누군가는 뭐 그깟 걸로 불화냐고 하겠지만, 내가 어떤 대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날은 그 상태가 불화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정확히 어떤 것과 불화가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그 또한 좀 모호한지라 불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 사고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다.


초, 중, 고, 대학, 직장을 거치는 동안 난 내가 속한 집단의 메이저리티에 공감해본 적이 거의 없다. 여기서 메이저리티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의하고 넘어가자면, 그건 집단 내 사람들 대부분이 선망하는 가치를 뜻한다. 주류 세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 집단 내에서 선호하는 조건들을 갖추었기에 영향력을 가진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 운동을 잘하는 사람,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 돈이 많은 사람과 같이 말이다. 그런 조건들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긴 한다. 못하는 것보단 잘하는 것이 낫고 못생긴 것보다야 잘생긴 것이 나으며, 없는 것보단 있는 것이 나으니까. 하지만 그 가치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좇느냐는 그와는 또 다른 문제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적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이란 세상 전부일만큼 중요해 보인다. 괴로워 하는 청소년을 위해 어떤 어른들이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다'와 같은 말을 해주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도 그런 말을 건네는 사람이 극소수임을 청소년들도 알고 있다. 세상 대다수의 의견은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아서 슬픈 것이다.


그 일이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가능하고, 누군가는 저 말에 평생동안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한창 태풍 속을 지나고 있는 학생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목숨을 걸 듯이 공부하는 모습이 선생님과 부모님에게서 모범적인 학생상으로 추앙받는다. 나도 인생의 대부분을 우등생으로 보냈지만, 공부에 몰입하는 데 어느 순간 한계를 느끼고 말았다. 대학만 잘 가면 인생이 핀다더라, 3년을 고생하면 30년을 편하게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어른들에서부터 내려와 우리들 입에서까지 오르내렸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머리로는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거기에 뼛 속 깊이 감화되어 목숨을 걸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하긴 했으나 필사적이진 않았다. 학생으로서의 본분이 공부라는 것을 망각하지도 않았고 게으르게 살지도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내가 이보다 더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동안 무의식 속에 숨겨진 것 같은 이 잠재적 에너지를 끝끝내 이끌어내진 못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치를 원하는 때에 100퍼센트 활용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나는 열심히 하면서도 더 열심히 하지 못하는 이유를 몰랐고 그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진로가 정해져 있는 대학에 진학했는데, 그런 대학의 특징은 보는 시각에 따라 장점이 곧 단점이 되기도 한다. 취업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기에 취업을 위한 방황은 훨씬 덜하나, 그 하나의 길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면 그보다 괴로울 수 없다. 지난 고등학교 생활처럼 나는 열심히 하지 않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대학교 과정을 무리없이 소화했고 심지어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내 삶의 궤적을 본다면 이 집단 내의 그 누구와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진로가 정해져 있는 대학 진학은 정확히는 내 뜻이 아니라 부모님의 뜻이었고, 내가 그를 받아들인 것은 나에게 딱히 더 나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더 열심히 하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이유를 이 때 발견했다. 제도권 교육 내에서 나는 사회적으로 선호되는 조건이나 가치를 획득하는 과정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으나 나는 그 가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 과정을 선택한 내 책임은 다 했어도 책임을 넘어서 순도 100퍼센트 열정까지는 발휘할 수 없었다.  


대학에서부터 보장받은 직장에 들어간 후 내게 생길 일은, 어찌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미리 예견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로 좁혀진 미래의 길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거쳐야 할 관문을 모두 통과한 채 일을 시작했다. 그럴 수 있었던 이면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선택을 했으나 어찌됐건 모든 것을 다 하긴 했던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여태 그러했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버렸다는 점에서 그 믿음이 무책임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전 소속 집단의 메이저리티인 공부와 취업은 그 가치들을 좋아하진 않았어도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었으나 이제 직장인이라는 집단에서의 메이저리티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럭저럭 해나가기가 더더욱 힘든 가치가 되었다. 돈과 결혼. 지금 내 나이 또래의 직장인들에게 이 메이저리티는 이전의 메이저리티보다 어떤 면에서 훨씬 더 성취하기 어렵다. 공부나 취업은 잘하기 위한 방법이란 것이 정해져 있지만, 돈과 결혼은 그 방법이란 것이 모호한데다 애초에 돈이 많고 적음의 기준과 행복한 결혼의 기준이란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방법이나 왕도가 모호하기에 이 두 가지를 좇기 위해 요구되는 노력은 훨씬 더 높은 자발성을 요한다.


집단의 메이저리티는 가지고 있으면 일단 편리하고 그렇기에 삶의 필수 요소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걸 가졌다고 해서 단순히 모든 행복이 결정나지는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반드시 집단 내에 존재한다. 내가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 자신이 그런 부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거대 도시에서 단절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직장과 같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구성된 집단 내에서 자신의 진짜 행복을 결정짓는 요소에 대해서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는 서로 관심도 가지지 않거나, 일로 만난 사이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혹은 알려주려고 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한다.


그런 상황에서 직장  사람들끼리  얘기란 당연히 메이저리티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 뿐이다. 어차피  벌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지사. 하지만 어떤 집단 내에 속했어도  집단의 메이저리티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못하는 나는 그런 이야기 속에 전혀 융화되지 못했다. 나는 부자가 되기 위한 방법을 굳이 찾으러 다니지도 않는데다, 결혼을 잘하기 위해서 해야할 것들이라며 선배님들이 조언처럼 해주시는 말을 들어도 마냥  나라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십여 년전이나 지금이나 이 집단에 속해있지 못하는 나 자신을 또 한번 느끼며 뿌리깊은 나의 정체성을 재확인한다. 이 집단에서도 또다시 마이너리티가 되고만 나. 나는 항상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그 확실치 못함은 소속 집단에서 결국 괴리감을 느끼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 과정에서 집단 내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소수의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이 행운이라며 안도하면서 그 집단에서 떠나기를 꿈꾸는 것이다. 왜 나는 살아오면서 속했던 그 모든 집단들이 다 싫었고, 지긋지긋했고, 결국엔 그곳을 떠나버리고만 싶어하는 걸까. 나만 이런 소외감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실은 모두 다 이런 감정을 느끼지만 다들 말을 안해서 모르는 건지 콕 집어 물어보기도 어렵다.


저 모든 생각을 '여기 사람들이랑 잘 안 맞다'라는 한 문장으로 축약했더니 엄마아빠의 반응이 볼 만했다. 아빠는 애써 그럴 수도 있다고 말은 했으나 내가 보기엔 그건 차마 내가 이상해서 그렇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에둘러서 말한 것 같다. 훨씬 더 직설적인 우리 엄마는 어느 날은 답답했던지 이렇게 물어봤다.



- 사람들이 그러고 사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게 중요하니까 다들 그러고 살지. 그기 아니면, 그럼 니는 뭐할건데?



엄마의 질문은 내게 퍽 심오한 울림과 의문을 남겼다. 내가 메이저리티를 좇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럼 난 무엇을 좇는 사람일까. 나는 다른 것을 사랑했고, 그것들은 대체로 소수자의 취향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건 어딘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고 몽상가가 할 법한 공상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본 적도 없는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달라이 라마의 저서에서 위안을 얻고, 내 세대에선 잘 알지도 못하는 왕가위의 영화를 보며 심적인 위안을 얻는 그런 행위들 말이다.


남들이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에 유학을 가는 상상에 취해있을 때, 이름도 모르는 제 3세계에서 살아보기를 얼마간 살아보기를 소망한 것도, 내가 원하는 미래를 그렸을 때 야자수 나무 아래서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하와이안 피자를 먹은 후 후식으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먹는 풍경을 상상하는 것도. 지금 글을 쓰는 것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완성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물론이다. 가뜩이나 책도 잘 읽지 않는 세상에서 굳이 존재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자발적으로 생각해낸다는 것은 보통 현실감 떨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막말로 글을 쓰면 쌀이 나오니, 금이 나오니.  


이런 생각은 끊임없이 해도 결론이 나지 않기에 어느 날은 내가 문제처럼 느껴졌다가 또 어떤 날은 이게 무슨 큰 문제냐며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는 공교롭게도 올해 초 겨울 내 생일 즈음이었고 생일이라고 마냥 즐거운 나이는 지나버렸는지라 심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때마침 생일 기념으로 친구가 내게 연락을 해서 우린 함께 종로구에 있는 '초소 책방'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우린 마음이 어지러울 때 한적한 서점에 가는 취향이 통하는 사이다.



초소 책방은 과거에 정말 초소(보초를 서는 곳)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라 산 중턱까지 꽤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우린 그 사실을 모르고 갔지만 책방에 온 사람들을 보니 다들 차를 가지고 오던가 아니면 등산 복장을 하고 오신 분들이었다. 날씨는 흐리고 추웠으나 오르막을 한참 올라갔던지라 우린 땀을 흘렸다. 야외에서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길래 우리는 아래를 조망하기 위해서 2층 테라스에 올라가 앉았다. 땀은 급속도로 식기 시작했고 여기서 아이스 커피를 마시면 추워질 것이란 생각에 뭘 시켜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포기하지 못했다. 친구 역시 아이스 라떼를 주문했고 아무리 겨울이어도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란 어쩔 수 없다며 우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스 음료를 좋아하는 것은 젊은 층에서 흔한 일이지만 얼죽아라면 문제는 또 달라진다. 아이스 음료를 좋아하는 것과 얼죽아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요즘같이 더운 날 아이스 음료를 먹는 건 지극히 당연한 행위지만 추운 날에도 아이스 음료를 시키는 것은 주변 환경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기 취향을 고수하는 행위다. 나와 친구는 흐리고 구름낀 날 산 중턱 야외 테라스에서, 덜덜 떨고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아이스 커피를 마셨다. 친구는 내게 생일 선물이라며 그 자리에서 만년필과 잉크를 꺼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써 보겠다는 나의 결심을 듣고 많이 고민해서 준비한 선물이 분명해 보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쥐다가 얼어버린 손으로 떨면서 만년필을 꼭 쥐었다. 아이스 커피와 만년필, 그리고 한적한 서점의 야외 테라스라는 조합이 너무 환상적이라서 웃음이 났다. 좋아하는 것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가질 수 있는 날이 인생에서 생각보다 많이 없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얼죽아를 마시다가 얼어 죽은 사람은 없겠구나. 얼어죽을 만큼의 추위에도 굳이 얼죽아를 마시는 사람은 자신의 취향으로 쌓아올린 나만의 작은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에 필수적임을 아는 사람이랄까. 얼어 죽을 것 같은 날씨에 내가 얼죽아를 마시며 덜덜 떨면서도 다른 손엔 만년필을 쥔 채 웃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얼죽아'라는 세 글자에 내 스스로를 마이너리티라고 생각하고 괴리감을 느낄 지 언정 나의 취향을 포기하지는 못했던 내 지난 날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와 함께 마이너리티의 자리를 든든히 지켜준 내 친구는 함께 얼죽아를 마시다가 다들 그게 중요하니까 그러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 엄마와는 다른 의견을 내놨다.



- 그건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잖아?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거지. 초, 중, 고, 대학교. 다 가야만 하잖아? 직장도 어쨌든 다녀야 될 것 아냐.



나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진 내가 여태 속했던 집단이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집단이 아니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찌됐건 어떤 집단에 속할 수 밖에 없고, 그 집단의 존재 목적에 따라 노력은 했으나 그 가치들을 마음 속 깊이 사랑하진 못해 늘 정신적으로 구속을 당한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해야만 하는 것에 묶인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일 뿐이니.


하지만 이 친구와 더불어 다른 친구들도 어찌됐든 필요에 의해 모인 집단에서 발굴(?)해낸 마이너리티들이기에 사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데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애초에 내가 원해서 속할 수 있는 집단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고, 그런 와중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기회도 갖지 못한 채로 타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멋대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걸지도 모른다. 왕가위 영화에서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린 수없이 많이 스쳐지나갔지만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날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날 우리는 얼죽아의 운명이 꽃잎 휘날리는 벚꽃엔딩은 되기 힘들겠다고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그냥 얼어 죽을래'를 외치는 우리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음을 확인했다. 덜덜 떨면서 차가운 커피를 입 속에 털어 넣고, 그러면서도 신나게 웃고 떠들기란 어지간한 열망으론 있기 힘든 일이다. 살아오는 내내 우리는 세상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 세상에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흔들릴 수는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감했다.


* 사진은 산중턱에서의 고집스러운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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