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이야기 3
양산 물금에서 낙동강을 따라가다 보면 시야가 탁 트인 곳이 있다. 아파트 단지가 빽빽하던 도시의 끝을 지나면 면적 1,873,000㎡로 푸른 평야처럼 펼쳐진 공간에 황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공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자연이 채색한 그라데이션이다. 강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바람결, 둑 위를 한 줄로 이어 달리는 자전거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한 폭의 풍경처럼 그려진다.
황산공원에는 이곳을 설명하기 위해 붙여진 네 개의 이름이 있다. 여유를 나누는 ‘즐거움의 공간’, 몸과 마음을 내려놓는 ‘휴식의 공간’,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체험의 공간’, 그리고 물 위에서 생기를 얻는 ‘수(水)의 공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곳을 걷다 보면, 그런 이름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여유를 즐기게 된다. 벤치에 앉아 해가 기울어가는 강을 바라보는 때는 ‘휴식’이 되고, 아이들과 자전거를 배우는 부모의 손을 볼 때는 ‘체험’이 되니까 말이다.
봄이 오면 황산공원은 꽃으로 봄소식을 알린다. 둔덕을 따라 번지는 벚꽃의 연분홍과 유채꽃의 노란빛이 섞여, 한동안 잊고 있던 ‘봄’이라는 단어를 눈앞에서 명징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여름에는 진한 초록 옷을 입고, 가을이 찾아오면 코스모스와 백일홍, 댑싸리, 핑크뮬리의 물결이 높고 맑은 가을 하늘 아래서 한꺼번에 피어난다. 겨울에는 야간에 불빛 정원을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계절에 어울리는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만들어 간다.
공원 깊숙이 들어가면 흙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는 황톳길이 나타난다. 신발을 벗고 발바닥으로 흙의 온도를 느끼다 보면, 어느새 도시 속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부드러운 촉감과 함께 작은 울퉁불퉁함이 감각을 새롭게 하여 몸의 긴장을 서서히 풀어주며 마음까지 느슨하게 만든다. 느리게 걷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조금 더 단순한 존재가 된다. 그저 걷는 사람, 숨 쉬는 사람으로 돌아간다.
해가 기울 무렵, 황산캠핑장 쪽으로 걸어가면 또 다른 풍경이 열린다. 텐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서는, 각자의 하루가 작은 마을처럼 동시에 펼쳐진다. 아이들은 잔디 위를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고기를 굽고, 어떤 이는 조용히 책장을 넘긴다. 같은 강바람을 맞으면서도 각기 다른 저녁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공원은 하나의 배경이자 동시에 삶의 무대가 된다.
황산공원의 길은 대부분 완만하고 부드럽다. 급하게 오르내릴 곳이 거의 없는 평지라서 아이의 작은 발걸음도, 어르신의 천천한 보폭도 무리 없이 품어 낸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걷다 보면 혼자 있는 사람보다는 둘, 셋이 함께 걷는 이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혹은 반려견과 나란히 걷는 발소리가 강물 소리와 섞여 잔잔한 합창이 된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종종 숨을 쉬는 일조차 계획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 점에서 황산공원은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숨 한 번을 허락하는 곳이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차로 조금만 달려 오면 도착하는 이 거대한 강변의 여백은, 바쁘게 쌓아 올린 일상의 틈새를 부드럽게 벌려 준다.
황산공원은 화려한 기념비나 거창한 시설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끝없이 이어지는 하늘과 강, 계절마다 달라지는 꽃, 그리고 그 안을 느리게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황산공원은 ‘관광지’라기보다, 마음속에 하나쯤 간직해 두고 싶은 산책로, 가끔 생각나면 다시 찾게 되는 강가의 벤치로 남는다 (1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