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을 하기 위해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만 한다고 한다.
또한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실패를 딛고 일어서야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실패를 겪어본 입장에서 이 말은 불편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실패에 머무른 사람을 무능력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종국에는 실패를 역병처럼 숨겨야만 하는 인생의 치부로 여기곤 한다.
개인적으로 20대는 오롯이 고시공부만 했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며 성공을 위해 그 시간을 견뎌냈다. 그로 인해 고생하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10년의 청춘을 투자함으로써 잃게 되는 기회비용이 아깝다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난 실패했다.
그리고 나서 펼쳐진 삶은 공허했고 가혹했다. 지상으로 추락한 날개잃은 천사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으며 힘겨웠다. 20대 후반에 느즈막히 입대한 군 생활의 육체적 고됨과 어린 선임의 갈굼조차 그 때의 막막함에 비하면 하찮았을 만큼 삶의 불안함이 주는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역을 한 후에는 현실감 없는 현실에 적응해야 했다. 성체가 되기 위해 오랜 시간 어두운 터널을 묵묵히 버티고 나아가던 애벌레는 정체성을 잃고 갑작스레 낯선 지상에 버려진 순간, 이제 더 이상 성체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아등바등 지상에 적응하고 살아가야만 했다. 모든 것이 초기화되어버린 또 다른 터널의 시작이었다. 그 때는 이 현실에서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망도, 인지도, 기대도 없었다. 도전조차 사치라고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한 가지 일에 투신했지만 그것이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면, 결국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큰 손실만 남는다.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지며, 소모한 시간의 가치는 남은 삶에서 결코 메울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실패를 떠 않은 채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물론 새로운 도전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갚아야 할 큰 빚이 있거나, 본인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도 동일한 도전의 기회가 주어질까? 그리고 이미 정신적,육체적,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뒤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기 위해선 얼만큼을 더 투자하고 희생하고 감내해야 할까?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을 어느 정도까지 뒤흔드는지 겪어 보았다면 다시 한 번 도전을 한다는 것이 얼만큼이나 힘든 일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실패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도전에는 그만큼 지불해야 하는 값이 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인상깊은 이야기가 있다. 그때 말씀이 자신은 공부를 하다보니 건강이 영구적으로 손상됐다는 것이었다.(간이 손상을 입어 평생 고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성공을 위해선 그 만큼의 노력이 수반됨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선생님은 노력을 강조하고자 하신 말씀이지만 나는 이 말을 통해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느 것은 없다는 만고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가족이 가난과 갖은 고난을 겪거나, 인간 관계에서 불화를 넘어 장애에 가까운 어려움을 겼는 사람도 있다. 단명하는 경우도 많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삶을 사는 사람도 많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사회적 범죄에 연루된 경우도 있다. 결국 성공을 위한 도전에는 그만큼의 손실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내가 고시생활동안 잃어버린 20대의 수많은 기회와 돈 처럼 말이다.
이 말은 반대로 힘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은 양질의 과실을 따 먹을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대가를 지불할 수 없거나, 지켜야만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은 도전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이들에게 실패의 주홍글씨를 씌우거나 함부로 평가하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최선의 노력과 선택 끝에 다다른 길의 종착지가 막다른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최소한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나는 시대는 지났다. 과거처럼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도전에조차 비용이 부과되는 지금은 그런 시대이기 때문이다.
실패의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듯 성공의 이유 역시 개인에게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본인의 능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운이 좋은 경우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어릴 적 위인전을 읽으면서도 이런 부분은 잘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운과 노력과 기회와 사회적 환경이 얽혀 그 모든 과정에서 생겨난 복합적인 결과물을 그 사람의 업적으로 치환하는 것은 심각한 비약이 아닌지 의구심이 일었다.
특히 요즘 많이 출간되는 자서전이나 자기계발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어떻게 해서 성공을 이루어냈는지' 보다는 '성공을 하기 위해서 또는 성공을 하고 보니 이런 부분이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결국 삼강오륜에나 나올 법한 뻔한 이야기이다. 이런 내용은 실제 도전에 직면한 사람들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 도전에 직면한 사람 중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결국 그저 '그래 나도 성공하겠지'라는 막연한 희망고문만을 남길 뿐이다.
예를 들면 성공한 투자자가 자신의 투자법칙을 알려주지 않듯이 앙꼬 없는 찐빵처럼 핵심은 빠진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투자성공사례에서 분산투자, 가치투자 등 투자이론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그 과정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근데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번의 투기가 성공을 했거나 상속이나 행운, 연줄, 인연 등 기타 어떤 이유로 큰 돈을 벌었고 그 이후 이런저런 투자를 하며 재산을 증식한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한테 필요한 건 그 투기 없이 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지만 결코 그에 대해선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들도 겪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도전에 신중해야 한다.
도전은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과연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가?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성공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준의 객관적인 성취가 성공일 수도 있다. 실패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배움이 있다면 그 것만으로 성공이라하기도 한다. 결국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자신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애로우면서 타인과 사회적 기준에선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가혹하게 설정하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남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조언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어릴 적 서울대를 가기 위해 공부가 우선인 사촌 형이 있었다. 집안의 장남으로써 해야 할 역할이 있었지만 이 모든 걸 내팽긴 채 공부에만 매진했다. 집안행사에 단 한번도 참석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우선으로 여기는 그 형을 보며 집안 사람들은 모두 뒤에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살면 안된다며 험담을 했다.(막상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종용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 형이 지불한 도전의 대가였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형은 삼수끝에 고려대학교에 합격했고 지금은 회계사 자격증을 따서 나름 잘 나가는 사회인이 되어 있다. 대신 집안 사람들과 그 형의 관계는 소원해져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이것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그리고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그렇게 공부를 했음에도 일정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형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 삶은 실패한 삶이 되었을까? 알 수 없다.
그 판단은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도전을 하라는 말보다는 이 말을 더 좋아한다. 설령 성공이 담보되지 못한다 해도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공에 대한 키워드라기 보다는 실패를 벗어나기 위한 키워드에 가깝다. 도전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한 번의 실패를 감내하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은 흐릿한 장미빛 미래보다는 이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딛여야 할 명분이다.
그리고 준비한다는 것은 거창하게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하루 하루를 꾸준히 채워나가는 그 과정이 중요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전공이나 직업등을 통해 한 분야에 들어서게 되면 그 궤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각자가 올라선 그 궤도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궤도에 오른 이상 그 길 위를 달리는 모든 사람들이 갖추게 될 기술이나 식견보다는 다가올 기회를 잡기위한 준비 과정이나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더 큰 성공을 담보하는 길이 있고 일찌감치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모가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실패를 겪었을 가능성이 높은 현 상황에서 그런 가정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기회를 잡고 성공을 하는지 여부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도 알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하늘의 뜻인 것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기회를 노려보는 것 뿐이다.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성공과 실패는 언제나 그 옆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잊는 순간, 실패를 맞닥뜨렸을 때 너무 놀라 그동안 쌓아온 지난 모든 삶을 부정하고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설령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준비하는 삶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누구도 실패 뒤에 다가올 절망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시작하는 사람에게 초를 치지 않기 위해서? 희망을 주기 위해서? 그저 실패는 딛고 일어서면 된다고만 한다.
그렇기에 말해주고 싶다. 한 번의 실패 뒤에 또 다시 도전할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한 번의 실패가 주는 페널티와 상실, 고통은 '하면 된다'라는 다짐만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치열하게 한번 뿐인 도전을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이다.
한 번 시작한 이상 절대 실패하면 안된다는 절박함으로 무조건 성공을 일궈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이 더욱 치열하게 인생을 살 거나 초인적인 능력을 발현하듯,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진 한계와 부딪히며 극복해 나가야 한다. 실패는 끝이며 그 다음을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도전을 하지 말길 바란다. 그런 사람은 그 뒤에 찾아올 실패를 감내할 힘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도 만일 실패를 맞닥뜨렸다면 실패를 받아들일 줄 알길 바란다.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으며 자기 부정과 우울증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를 했을 때 그 원인을 외부적(사회적, 경제적) 여건에서 우선 찾길 바란다.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것은 답이 없는 시험지를 받아든 느낌이다. 이미 실패한 사람들에겐 그것이 오롯이 자신의 탓은 아님을 이야기 하고 싶다.
남은 삶에서 실패의 여파는 복병처럼 수시로 찾아와 괴롭힌다. 흉터처럼 인생에 남아 언제나 남은 삶에 영향을 미친다. 자신보다 앞서 나간 사람, 행운을 타고 난 사람이 끝없이 나타나 내 인생의 값어치를 비교하게 만들며, 과거에 발이 묶여 새로운 도전의 기회 앞에서 번번히 좌절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수시로 찾아올 실패의 여파 앞에 흔들리지 않도록 실패가 남긴 상황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자신의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재기를 위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조금씩 버티며 실패의 빚을 갚아나가야지만 비로소 언젠가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전과 갈등은 공존할 수 없다.
실패는 극복되어지지 않는다. 노력한다고 도전한다고 다시 성공이 있다거나 좋은 일이 있을거라 이야기할 순 없다. 그렇다고 흘러가는 대로 살기에는 삶은 길고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그렇기에 실패 앞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