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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른이 Feb 20. 2021

이제 다시는 야근을 하지 않으리

고된 야근을 잃고 치열한 근무시간을 얻자

이제 더는 야근을 하지 않으리


업무는 아득바득 처리해도 끝나지 않는다. 그 뒤엔 또 다른 업무가 무료급식소 앞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줄 서 있다. 일은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야근으로 업무를 기한에 맞춰봐야 회사는 당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일은 일단 처리되었으니까 과정이야 어떻든 회사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야근을 하는 직원을 위로하고 보상을 해주거나, 야근을 더 이상 하지 않도록 인력을 충원해 주거나, 업무분장을 다시 해서 업무 효율성을 높이긴커녕 직원을 한 명 더 감축할 것을 고민한다. 이상하게도 일은 계속 늘어나는 데 인원은 점차 줄어든다. 


일이 너무 힘들다고, 몰린다고 이야기를 하면 돌아오는 것은 업무를 개선하라는 지시사항이다. 그 일은 네가 제일 잘 아니까 네가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 일단 그려오라고 한다. 참 편한 말이다 싶다. 그 마법의 한 마디로 상황은 변한다. 증명의 책임이 내게로 돌아온다. 오히려 일이 늘어난다. 

막상 개선방안을 가져가면 바뀌지도 않는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한다. 지시사항이라 안되고, 상사가 불편해해서 안되고, 고객이 불편해서 안되고, 그냥 안된다. 그럼 나는? 원래 그때는 다 그런 거라고 한다. 그 자리는 그런 거라고 한다. 한 때라고 한다.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그렇게 나만 불만이 많은 사람이 된다. 시작도 하지 말 걸. 후회만 늘어난다. 일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주 52시간이 도입되었을 때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야근을 탈출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일단 쉬는 시간이 사라진다. 점심시간도 쪼개가며 일을 하게 된다. 화장실 한 번 제대로 가기 힘들다. 그래도 여전히 주 52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할 야근, 칭찬은 기대도 안 했건만 이제는 욕을 먹으며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한다. 52시간을 초과해서 근무하지 않도록 삼엄하게 체크되는 근무시간 때문에 눈치가 보인다. 야근을 허락해 주는 것을 감사해한다. 

초과근무에 따른 대체휴가 같은 보상은 전혀 기쁘지 않다. 휴가를 가면 뭐 하나. 어차피 일은 그대로인데. 오히려 하루 자리를 비우면 그다음 날은 몇 배 강력한 쓰나미가 되어 몸과 마음을 덮칠 뿐이다.


"요즘 힘들지? 일이 많은가 봐. 너무 고생한다. 야근 좀 줄이고 빨리 가자."


건조한 위로의 말은 싸늘하게 비수가 되어 꽂힌다. 결국 집으로 일을 가져간다. 누가 시킨 적은 분명히 없는 데 어느 순간 자연스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또다시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만 남는다. 


회사는 이 '잘 운영되는' 부서에 추가로 업무를 부여한다. 이미 인원은 부족하고 업무는 포화상태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이해하지 못한다. 엄살 부린다고 생각한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사는 직원들의 야근의 원인과 고됨에 관심이 없다. 노력했던 그 많은 시간이 허무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 없이 없음이 무섭다. 재주는 직원이 부리고 성과는 임원진이 챙긴다. 그게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씁쓸하다. 야근을 버틸 자신이 없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핵폭탄 같은 지시사항이 투하되었다. 


"업무 절차를 개선하고 간소화하여 업무 효율성을 제고할 것"


윗선의 요구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잘해라~!' 다. 자 이제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감소할지 정하고 협의하고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새로운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또 일이 늘어난다. 늦은 밤 여러 업무를 급한 대로 쳐내면서 새로운 대안을 고민하다 보면 울컥울컥 올라온다. 


일주일에 중복되는 회의만 줄여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사장님도 임원님도 팀장님도 회의는 거를 수 없겠지. 필요하니까. 현황을 수시로 파악하고 또 그 위에 보고를 해야 하니까. 회의만을 위한 자료 준비를 위해 취합하고 정리하고 문구를 다듬는 데 대체 얼마의 시간과 인건비가 들어가고 있는 건지 생각해 봤을까?

물론 회의는 필요하다. 회의를 없앨 수는 없다. 그저 적어도 회의 시간을 줄이거나 횟수라도 줄어들기를 바란다. 회의의 필요성보다는 회의가 없을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해결방안은 없는지 먼저 고민하면 좋겠다. 그리고 보고자료도 원페이퍼로 간소화되면 금상첨화다. 꼭 그렇게 여러 장의 PPT가 필요한가? 꼭 그렇게 모든 자료가 잘 준비되고 직관적이어야 하나. 급하면 좀 인간적으로 넘어갈 수 있을 텐데. 


의사결정은 또 어떤가? 팀장이 결정하면 임원이 뒤집고 임원이 결정하면 그 위 임원이 뒤집는다. 그것마저 사장님이 또 뒤집는다. 결국 모든 결정은 사장님 몫이다.

그런데 사장님은 뭘 알까? 어차피 아무리 보고 받아봐야 그 일을 제일 잘 아는 것은 실무자고 그다음이 팀장이다. 그럼 사장님은 보고를 왜 받을까? 결국 방향성, 사업성에 대한 결정이다. 세부적인 것은 좀 아래에 맡겨도 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아래에서 책임지고 진행하면 안 되나? 

사장님 중심으로 결정이 몰리면 일단 보고를 할 때마다 내용이 바뀌고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최악은 어느 순간 사장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최초 보고의 취지마저 변질되는 경우다. 사장님 마음이라도 편히 해드리자는 건지, 일 잘한다는 생색을 내고 싶은 건지.  

당연히 보고는 받아야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와 수준이다. 윗사람이 보고를 받는 것을 중요시하고 모든 것에 간섭하게 되면 업무 성과는 떨어진다. 단순한 문제다. 정해진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할 시간이 줄어들면 당연히 효율성은 떨어진다. 보고와 회의는 '생산적'이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편하게 보고를 받기보다는 윗사람들이 직접 관심을 갖고 현업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한 번 겪어보면 그 어떤 보고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법이다. 실제로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다. 사장님이 바뀐 후 영업팀에 대해 굉장히 많은 변화 요구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과 배치되는 부분이 많았기에 이 부분을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변화를 거부하는 게으름과 관성으로 폄하되었고 우리에게는 무능력하다는 낙인이 찍혔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사장님이 직접 영업을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그 이후 사장님의 우리 팀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졌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팀장과 임원은 사장님한테 뭘 설명했고 무슨 회의를 한 걸까?


윗사람만 문제가 아니다. 이 야근의 주요 원인은 동료 직원들이다. 회사에는 꼭 혈관의 혈전 같은 존재들이 있다. 본인의 자의적 판단과 업무 편의성을 위하여 유드리란 이름 하에 절차를 무시해 버린다. 그런 존재들은 절차 자체가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매번 찾아와서 예외를 인정해 달라 요구한다. 

업무 절차라는 것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업무 절차는 최대한 간소하고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노력한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의 업무 절차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셈이다. 그리고 그 원칙을 지켰을 때 조직은 원활하게 업무가 흘러간다.

그런데 이런 존재들이 윗사람이 시킨 건 칼 같이 잘 지킨다. 더 심한 경우는 원칙을 지키지 않은 일처리로 사건사고가 발생하고 정작 그 뒤처리는 다른 팀에 전가해 버린다. 할 줄 모르고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개인의 무능과 이기심을 왜 조직이 책임져야 하는지 답답하다.


그렇게 업무 효율성 개선은 업무 시간을 갉아먹고 아무런 성과 없이 바쁜 일상에 묻혀 풍화되어 버린다.




예전엔 야근을 당연시하지도 않았지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급적 제시간에 일을 끝마치려 노력하지만 필요하다면 상황에 따라 야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꼭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단순히 야근을 하기 싫은 감정이 앞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야근의 늪에 빠져 가까스로 뻗은 손을 회사가 외면하기 전까지는. 


야근은 그냥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사고가 터지고 위기가 닥쳐야 회사는 변화를 꾀한다. 직원이 무리를 해서 야근을 하면 이 자정작용의 가능성을 문 닫을 뿐이다. 정시 퇴근이라는 백신 접종만이 이 난세를 헤쳐나갈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는 정시 퇴근을 하려 한다. 그래서 일이 밀리면 어쩔 수 없는 거다. 예전엔 일을 끝내지 못하면 무능하다는 낙인이 찍힐 게 두려워 무리를 하게 된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야근을 일을 부르고 또 다른 야근을 촉발시킨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그냥 이제 일이 밀리면 밀리는 거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막상 밀려도 또 회사는 금방 적응해서 결국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도대체 그동안 뭐 한 거지? 그 수많은 야근의 밤은 무슨 의미가 있던 걸까? 정말 필요했던 순간이었을까?


인생은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잃는 법이다. 이젠 고된 야근을 잃고 치열한 근무시간을 얻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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