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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른이 Feb 03. 2019

R&R 보다 사내 공공재

지금껏 이런 직원은 없었다. 이것은 인재인가? 호구인가?

1.

 나의 직장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허둥지둥 조급히 흘러간다. 드라마에 나올 법한 업무 스케줄을 완벽하게 조정함과 동시에 스마트한 일 처리 방식을 통해 효율적이고 완성도 높은 결과를 내는, 그러면서도 야근을 하지 않고 주어진 근무시간에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완벽한 비지니스맨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런 면에서 주 52시간 근무제가 우리 직장생활에 어떤 십자가를 지울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당연히 워라벨이 중요하고 주52시간 근무를 반대하진 않지만 나처럼 더 큰 프레셔와 난이도 상승을 초래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오늘도 아침부터 허겁지겁 컨베이어 벨트 위 부품을 조립하듯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사업부장의 호출이 온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인사를 드린 후  공손한 자세로 수첩을 펴고 경청하는 자세로 앉자마자, 역시... 새로운 업무 지시가 떨어진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평범한 업무가 아니다. 현재 회사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새롭게 분석하고 검토해보는 업무다. 요약하자면 뜬 구름 잡는 노가다성이 짙은 업무다. 야근과 피로를 동반한 업무 태풍이 생성되는 순간이다.

물론 이런 식의 분석과 도전은 중요하다. 회사가 발전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왜 그 담당이 나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업무와의 연관성은 술잔을 입에 털고 남은 술잔 바닥 소주 몇 방울만큼 적은데 말이다. 두 자리 옆에 그런 일에 더 적합한 기획팀이 있는데 말이다.


다시 내 책상으로 돌아와 앉아 업무 리스트를 열고 순서를 조정한다. 빠른 피드백을 원하는 사업부장의 스타일상 이 업무를 최우선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켜본다.

그때 내 귓가로 불안한 소리가 들려온다. 사업부 포상 행사를 진행한다며 담당 부서장에게 지시를 하는 사업부장의 목소리...그 때 직감한다. 

'이번 달은 틀렸어.'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을 때, 역시 메신저가 날라온다.


'과장님 회의실로 잠시 모이시랍니다.'



2.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나를 포함해서 언제나 이런 자리에 모이는 뻔한 멤버들이다. 바로 이들이 사업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선가 나타나는 사내 공공재 직원들이다.

이 들에게도 분명 개개인의 고유 업무가 있고 R&R이 있지만 훗!  개나 주라지. 우리 사내 공공재 멤버들에겐 R&R따위 잊혀진 지 오래다. 자신의 고유업무보다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개별 프로젝트의 비중이 훨씬 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내 공공재 멤버들의 R&R은 '담당자가 없거나 이벤트성으로 발생하는 돌발업무 및 누구도 나서서 하고 싶지 않은 일 전반'이다.


이렇데 된 원인을 되짚어보면 고유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 산재한 허들이 해결되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다 보니, 결국 급한 놈이 우물판다는 말 처럼 R&R과 상관없이(라 쓰고 떠 안았다고 읽는다)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버리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젠 의례 그런 일이 생기면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찾는다.

이런 이미지가 회사 생활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이 윗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 조차 이런 일이 터지면 '그건 그냥 저 친구가 하면 되는 거 아냐?' 라며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업무를 지시한다. 그 정도 분위기면 내 일이 아니라며 항변을 할 수도 없고 해봐야 '그냥 네가 해라'란 말 밖에 돌아오지 않으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것이 이런 거겠지. 아니 제 무덤 제가 판 건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궂은 일이라는 것이다.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보상 받을 수 있는 업무는 누구도 남에게 넘기지 않는다. 뭐 가끔 삶을 초탈하신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그건 논외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내 고유 업무 보다 이런 사내 공통 업무 및 부속 업무 처리에 할애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최소 내 업무의 50%에 달한다고 보여진다. 이 정도되면 업무방임죄에 걸리지 않을 지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원하고 도와줘야 할 영업사원들이 내 도움따윈 원래 없어도 된다는 듯 알아서 잘 상품을 팔아오다보니 내 존재감은 더욱 희석되어 간다. 그렇게 날이 갈수록 사내 대표 공공재로 한층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걸 선순환이라 하야할 지 악순환이라 해야할지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공통업무는 누구나 해야 한다. 그런일은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맡을 수 있다. 조직 운영상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문제고 직원들이 잏하고 감수해야 하는 문제다. 이런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조직은 삐걱거리고 별 것 아닌 문제들이 모두 튀어나와 사무실에 혼란이 도래한다. 나도 안다. 그래 다 이해할 수 있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왜 그게 나'만' 맡아야 하냐는 것이다. 왜......나 만!!



3.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고착화 되다 보니 몇 가지 심정의 변화가 생긴다.

처음에는 짜증과 불만에 휩싸인다. 왠지 억울하고 이 불합리함이 나를 불행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처럼 느껴진다. 회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주변 동료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결국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어느 순간 무감각해지며 그러려니 하게 된다. 이렇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 잠시동안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되며 몸은 바쁘지만 정신은 편안한 상태가 된다. 사실 이 순간은 이를 인정했다기 보단 체념과 관망하는 태도로 바뀐 것이다.

그러다 그 업무를 통해 칭찬을 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갑작스레 보상을 받았다는 기쁨과 성취감이 몰려오며 그 일을 쓸데없이 열심히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속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업무로 인한 꾸중이라도 듣거나 새로운 공통업무가 주어지게 되면 그 성취감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더욱 커진 좌절과 자괴감을 선사한다. 가라앉았던 짜증과 불만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왜 이렇게 짜증과 불만이 생기는지 가만히 돌아보면 결국 이유는 하나다. 그건 바로 정체성의 혼란이다.

사내 공공재 인원이라고 해서 평가 기준이 다르지 않다. 결국 고유 업무가 평가 기준이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고유 업무로 일정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이 직원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업무에 대한 노력과 월급, 성과급, 승진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공통 업무를 한다고 안쓰러워하고 응원을 해주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 공은 잊혀진다. 결국 '가외 업무'이기 때문이다. 기억되는 때는 업무 결과 문제가 발생해서 책임소재를 찾을 때 뿐이다.

결국 업무성과와 보상이 연결되지 않으니 책임감있게 업무를 진행하기 어렵다.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의심된다. 그저 사고 안날 만큼만 대충 해치워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데 그런 업무 전담이라니...결국 그 공공재 인원은 대체 나는 왜 이걸 하고 있는건지, 이 회사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지, 난 잉여가 아닌지, 내가 너무 만만하고 우스워 보이는 건지 계속 스스로를 의심하고 질문하게 된다.


게다가 공통업무는 결국 고유업무에 조금이라도 지장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공통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 입장에선 불만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은 언제 하고 퇴근은 언제 하나.

이런 상황에서 고유업무의 결과물이 좋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달라고 외치고 싶다. (물론 외칠 일은 없다. 난 소심하니까..)



4.

물론 윗 사람이 시킨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아랫사람의 도리인지라 공공재의 역할마저도 충실히 그리고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한다. 그것이 사실 R&R에 앞서 회사원의 진정한 역할이지 않겠는가. 일을 시키는 윗사람을 향해 한숨을 쉴 수는 있지만 원망할 수는 없다.


정작 더 기분이 나쁘게 만드는 건 혼내는 시어머니가 아닌 말리는 시누이 같은 주변 동료들이다. 주변 동료들은 나만 아니면 돼의 복불복 정신으로 부담스런 업무는 회피하기 위해 애쓰면서, 도리어 이건 네 담당이 아니냐며 훈수를 두거나 일을 자꾸 덧붙여 키우는 경우도 있다. 정작 본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회의 자리에서 이런 방향으로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둥, 이런 일은 내가 다 해봐서 알지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둥...말은 또 겁나게 많다. 그리고 결국 그 말은 돌고돌아 내 업무를 더욱 어렵고 길게 만든다. 그럴거면 지들이 하던가.

(정말 내가 니 후배인 걸 하늘에 감사해라...)


이런 공통 업무일수록 옆에서 도와주고 자발적인 참여가 도움이 되고 결과를 만드는 것임에도, 그리고 선배들은 그런 경험이 있음에도, 한다는 소리가 '아이고 힘들겠다. 고생해라. 원래 다 그런거다' 따위 뿐이다. 하물며 원래대로라고 하면 이 업무를 담당했어야 할 담당자조차 그 따위 소리를 아무런 인사이트 없이 내 뱉는 걸 보면 주둥이를 홱 하고 잡아채버리고 싶은 충동을 꾹꾹 억누르게 된다.


이건 마치 사막에서 탈수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오아시스를 가면 살 수 있다고 응원하며 자기는 수통의 물을 남은 한방울 까지 털어먹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나. 그런 상황에선 멱살 잡히고 모래바닥에 쳐박히고, 수통을 뺏기고 사막에 뭍혀버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란 말이다.


 5.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시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며 책상을 정리한다. 오늘 처리한 일, 처리하지 못한 일, 내일 할 일 목록을 정리하다보니 순간 실소가 터진다.

정작 내가 책임지고 수행했어야 할 업무는 기한을 이미 초과한 채 업무 리스트 뒤 편에 밀려 있다.

업무 순서를 정리하면서 뒤로 밀린 업무부터 내일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가장 먼저 처리해야 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 불안감이 뒷골을 간질인다. 알기 때문이다. 내일 언제고 담당 임원이, 담당 팀장이 해당 업무의 진행사항을 체크하고 결과물을 독촉하는 순간 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모든 회사의 관리자 여러분~일은 좀 나눠서 시켜주시고 직원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고 어떤 일들을 하는지 좀 들여다 봐주시길 바랍니다.


제발 시키는 놈만 찍어서 일을 시키지 말아달란 말입니다. 내가 공공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쓰레기통도 아니고 아무거나 다 던지진 말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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