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노트북을 내려놓으며 의자에 무너지듯 앉는 우수남 씨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한숨이 쏟아진다. 무심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켜고 조금 전 보고자료를 들여다보지만 화면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은 화면에 머물고 있지만 헝클어진 머릿속은 조금 전 회의실에서 있던 일을 자꾸 되뇌고 있었다.
평소 온화한 편인 사업부장은 이상하게 수남 씨가 보고를 할 때면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 같다. 수남 씨가 보고하는 안건이 중요해서 그런 것인지, 그게 아니면 수남 씨의 보고가 부족하고 못 미더워 그런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인지 수남 씨는 머릿속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다.
특히 오늘은 그렇게 복잡한 사안도 아니었고 주 단위 진행사항 정기보고 일정 중 이번 주는 수남 씨 부서의 차례였을 뿐이었기에, 평소와 다른 사업부장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다른 팀장들 앞에서 혼이 나다 보니 일견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회의를 마치고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네는 선배, 동료 팀장들에겐 아무렇지도 않다고 변명 아닌 변명까지 하고 나니 책상 앞에 앉는 수남 씨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튀어나온다.
오늘은 수남 씨에게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이다. 바로 수남 씨가 팀장으로 발령받은 지 정확하게 1년이 된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 보고를 들어가기 전만 해도 보고를 깔끔하게 마치고 팀장 1주년 기념 감사인사 멘트까지 준비했건만, 생각과 달리 '죄송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만 반복하다 보고를 마쳤다.
작년 말 조직 개편을 한 달 앞둔 때였다. 지금은 퇴직하신 전 사업부장과 갑작스럽게 마련된 저녁식사 자리에서 당시 수남 씨의 팀장이 타 부서로 발령받으면서 수남 씨가 대신해서 팀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수남 씨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어버버 하다 겨우 뱉은 말이 '감사합니다.'였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팀장으로 내정되는 과정을 전해 들으며 수남 씨의 팀장이 적극 추천했고 더불어 현재 회사에서 수남 씨만큼 해당 팀의 업무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는 직원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리 알은체를 하지 말란 사업부장의 신신당부에 그로부터 한 달간 소문이 빠른 직원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도 모르쇄로 일관해야 했다. 그렇지만 내심 밀려오는 뿌듯함과 왠지 그 간의 노력을 인정받았다는 기쁨에 얼핏 얼핏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팀장 발령 소식을 듣고 나니 그동안 머릿속을 헤짚던 회사에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고 왠지 탄탄대로를 달리는 창창한 앞길이 그려졌다. 이제 정말 회사로부터 인정받아 리더 그룹에 속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한 단계 성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같았다. 잘하고자 하는 의지는 불끈불끈 고개를 들었고 열정이 샘솟았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수남 씨에겐 지금 함께 하고 있는 팀원들이 달라 보였다. 그동안 팀원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료였다면 이제는 수남 씨가 어떻게 이끌지, 어떻게 하면 팀 전체가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에 수남 씨는 리더십에 대해 고민해 보며 관련 동영상 강의나 책을 찾아보기도 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한 달은 뭔가 붕 뜬 채 보냈던 것 같다. 한 달 후 맞이할 팀장이라는 세계를 상상하며.
하지만 수남 씨도 그때는 미처 몰랐다. 팀장의 세상은 팀원이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팀원이 보고 판단했던 표면적인 모습들만으로 꿈꾸던 장밋빛 미래는 목적지를 한참 잘못 설정했다는 것을.
물론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얼마든지 오해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추정할 수는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팀장과 팀원은 같은 회사 안에서 같은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임에도 전혀 다른 법칙이 작용하는 다른 차원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무를 담당하던 팀원일 때는 너무나도 유능했고, 그 업무에 있어서만큼은 대표이사 앞에서도 꿇리지 않던 수남 씨의 자신감은 팀장이 되고 나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변화된 회사의 요구사항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끝없는 고민과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팀장 발령 후 1년이 지난 이 시점, 수남 씨는 모니터를 보며 다시 한번 한숨 지며 혼잣말을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