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은 내가 갈 길은 아닌가 보다
'월급은 생활을 위한 돈일 뿐, 돈을 벌기 위해선 다른 걸 해야 한다.'
예전에 들었던 말이 귀에 맴돈다. 당시엔 절대적인 명제 같았던 말이지만 현실 앞에선 그런 믿음 따위 스러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눈 앞에 펼쳐진 파란색 마이너스 그래프의 향연에 입이 바짝바짝 말라간다.
'손절을 할까? 기다릴까? 회복될까? 다른 종목을 팔아볼까?'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지만 결국 오후 3시 반이 지났을 때까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차라리 장이 마감하고 나니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마음은 안정을 찾는다.
'내일은 오를꺼야..곧 회복될거야..'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불안감을 위로하며 차트를 닫고 괜시리 경제면 뉴스를 뒤적인다. 좋은 소식이 없나 살펴보다가 조금만 부정적인 어조의 기사만 발견해도 심장이 콩닥거리고 불안해진다
'너는 절대 투자할 성격 아니다. 그냥 성실히 월급 모아라.'
부모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며 후회와 자기변명 속에서 허우적거리지만 한번 크게 벌어본 경험이 떠오르며 억지로 모든 고민을 틀어 막는다.
'그래 기다려 보자. 회복된다. 무리한 수준의 호가는 아니니까. 존버다 존버'
내일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겠지만 벗어날 수 없다. 아니 벗어날 생각이 없다. 될거다. 아니 되어야 한다.
누가 그랬나 빨간색이 흥분을 야기한다고. 하지만 경험을 해보면 안다. 파란색은 빨간색보다 더 큰 공포와 감정의 과잉을 양산함을. 마치 파란색 불꽃이 빨간색 불꽃보다 온도가 높은 것처럼.
주식이라는 것이 변화무쌍하다보니 하루에도 열 두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그렇게 매일 매일 휘항찬란한 붉고 푸른 그래프 속에서 오늘은 오를까, 내일은 떨어지려나 하는 초조와 기대, 불안감과 희열감이 뒤섞이며 감정의 과잉은 갈수록 증폭되며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킨다. 증시 시장은 어쩌면 이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의 과잉은 강력한 각성제처럼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개미 직장인들 모두가 high risk, high return이란 것은 잘 안다. 모두가 시작할 때는 return을 바라보며 뛰어들지만, 하락장에 물린 순간 risk만이 보여 불안감과 공포를 증폭시킨다.
반대로 박스권에 같혀 변동이 적으면 또 그것은 그것대로 답답해 속이 터질 겉으니 결국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이다.
하지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박스권 보다는 내릴지언정 변동이 있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왠지 나만 아니면 된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이런 복불복 정신이 어쩌면 개미 직장인들의 본질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개미 직장인들의 하루는 오전 8시 반이면 주식 차트를 열며 시작한다.
아직 본격적인 장이 열리기 전이지만 내가 매수한 종목의 변화를 미리 감지할 수 있기에 눈여겨 살펴본다. 시시각각 변하는 호가를 살펴보다 어느 순간 금액 표시가 파란색으로 되면 내 심장은 한층 더 빨리뛰며 마음 속으로 '제발, 제발'을 외치게 된다. 그 순간에는 '팔까? 기다릴까?' 생각이 많아지고 얼른 증시 뉴스를 열어 오늘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다. 시장이 상승세인지 하락세 인지 분위기를 살핀다.
뿐만 아니라 둘 이상이 모이기만 하면 주식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수시로 변화를 감지하고 관련 최신 뉴스를 접하기 위해 여기 저기 귀를 열어둔다. 누군가 좋은 소스를 던지기라도 하면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한참을 고민하고 아닌 척 관련 자료를 조사하기도 한다.
한참 일을 하다가도 문득 매수/매도 시점이 다가오면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가 휴대폰을 붙잡고 치열한 매수/매도의 전장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개미 직장인들의 또 다른 특징은 처음 몇 번의 투자 실패의 쓴 맛을 보고 나서는 다시는 안 한다고 돌아서기를 몇 번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된다. 처음에는 손실의 쇼크에 장을 떠나지만, 쇼크가 무뎌질 때쯤 들려오는 가까운 사람의 일확천금 소식이 들리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와 함께 초라한 내 생활에 대한 상대적인 박탈감이 폭발하는 순간 결국 다시 투자 시장에 뛰어 들게 된다.
다시는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발목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자', '시장이 하락세일 땐 투자금을 빼놓자', '단타보다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하라', '작전주 보다는 건실한 기업에 투자하라', 은행 이자보다 더 나오면 만족하자'와 같은 각자 나름대로의 투자 기준을 세워 시도를 한다.
하지만 결국 예측하기 어려운 시장과 조금씩 커지는 욕심이 만나면서 순식간에 평정을 무너뜨리기 일쑤다. 투자금의 수익률이 붉게 물드는 순간이면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며 이익실현을 주저하다 파란 악마에 저당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는 이 시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치 악마에 저당잡힌 영혼처럼 개미 직장인들은 돈에 영혼을 저당잡힌 건 아닐까.
가끔 자신의 이런 모습에 자괴감도 들고 한심하다고 느끼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개미 직장인들에게 일확천금의 기회가 잠든 이 증시시장은 공성전 최전방에 내몰린 병사들이 오르길 강요받지만 동시에 살기 위해서는 오를 수 밖에 없는 굳건한 성벽과도 같은 것을.
평범한 직장인의 생활이 그렇다. 신문에 날법한 인센티브는 꿈도 꾸진 못해도 평균 수준의 월급에 적당히 바쁜 업무에 하루 하루를 소진한다. 이런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란 것이 (요즘 같은 불경기엔 이 마저도 감지덕지이지만) 언제나 뭔가 불만족스럽고, 특히 돈은 항상 부족하여 허덕인다.
그런 삶 속에서 평범한 직장인의 삶에 주식이란 서광과도 같다. 언제나 절박한 삶속에서 일확천금, 꽁돈, 비자금을 벌 수 있는 기회란 너무 달콤해서 외면할 수가 없다. 물론 그 기회가 숨겨진 진흙속의 진주가 될지 칼날 위 피를 핧다 말라죽는 늑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혹자는 이런 무리를 한심하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언제나 돈이 부족한 가장으로써 적당한 월급을 받고 열심히 아끼는 것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월급만 모아서 수도권 내에서 아파트라도 한 채 사서 대출을 갚아나갈 수 있나? 남들이 볼 때 '오~!'라고 할 만한 자동차 1대라도 굴릴 수 있나? 내 자식이 공공임대주택에 산다고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나?
고생하는 아내에게 명품 백 하나 정도는 살면서 사줘봐야 하지 않나. 부모님 여행한 번 보내 드리고, 나도 유럽여행 한번은 가보고 죽어야지 않겠나. 그냥 큰 거 안 바라고 조금은 평범하게 남들 해보는 건 한 번씩 해보면서 살고 싶은데, 물가는 미쳐 날뛰고 집값은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이 사회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게 참 힘들다.
결국 성실히 열심히 한 평생을 바친 들 그 피땀의 대가인 월급으로 우린 제대로 된 인생을 꾸릴 수 있는가? 상속과 주변의 도움없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 이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벗어나 외각으로 외각으로 나가지 않는 한 이 도시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입고, 먹고, 살고, 즐기고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나갈 수가 없다.
이런 현실은 결국 자기부정과 혐오로 이어져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신에 절망하고 무너지게 된다. 나도, 가족도 행복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위로도, 작은 것에 느끼는 행복도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1등이 아니라 그저 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것 뿐이다. 적어도 우리 자식들이 주눅들지 않고 주변으로부터 혐오스런 시선을 받지 않을 만큼. 속물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주식 시장에의 참전은 또 다른 의미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월급으로는 평범하게 살기도 어려운, 생활을 겨우 영위할 수 밖에 없는 이 잔혹한 세상이 직장인을 이 전쟁터로 내모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