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다신 만나지 말자
5:15
고막을 때리는 휴대폰 알람에 돌아오지 않는 정신을 부여잡고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몇 번의 시도 끝에 알람을 멈춘다. 그러나 젖은 이불 처럼 무거운 몸과 정신은 돌아올 기미가 없기에 이불 속에 다시 쓰러지듯 누워 버린다.
6:15
혹시 몰라 맞춰 둔 두 번째 알람에 퍼뜩 정신이 들어 시간을 본다. 원래 계획보다 늦었지만 여전히 무거운 몸을 일으킬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대로 누운 채로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가장 늦은 시간을 가늠하며 무기력한 탈력이 지배한 몸을 1초라도 더 누이기 위해 애를 쓴다.
6:40
허둥지둥 지하철에 올라타 앉을 자리를 찾는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출근하는 사람이 많은 터라 조금만 방심하면 자리는 금새 차버려 40분 가까이 서서 가야 하는 비극을 감수할 수는 없다. 그리곤 사람들 틈바구니에 몸을 억지로 끼워 넣으며 대충 가방을 갈무리 하고 그대로 뒤로 기대어 눈을 감는다.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잠을 청해야 한다.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신체 컨디션은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자제하고 싶고 안개가 낀 듯 먹먹한 머리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먹은 술 떄문인지 요즘 쌓여가는 스트레스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오늘 아침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7:40
회사 앞 체육관에 도착한다.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에 있는 조그마한 건식 사우나에 들어가 눈을 감는다. 몸 컨디션이 정상이 아닐 때는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거나 사우나를 하면서 땀을 좀 빼야 풀리기 마련이다. 체육관 한켠에 준비된 조악한 사우나지만 이럴 땐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살짝 찬바람도 새어 들어오지만 조금이라도 따뜻한 공간에서 몸을 쉬일 수 있다는 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다.
고작 출근을 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천근만근이니 오늘 하루를 어찌 보낼지 걱정이다. 왠지 이런 날일수록 일이 안 풀리기 마련인지라 불안하다.
8:30
컴퓨터를 켜고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사무실 책상을 세팅한다. 모니터를 쳐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 막힐 것 같은 느낌에 괜히 일어나 사무실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갈 곳이 없기에 화장실을 들러 급하지도 않은 볼 일을 보고 거울 앞에 서서 퍽퍽한 얼굴을 들여다 본다.
검은 반점과 기미의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조금은 붉게 상기된 피부를 보자니 자꾸 나이를 실감하게 된다. 목주름과 왠지 탄력을 읽고 쳐진 듯한 얼굴이 이제 나도 젊음을 잃어버렸음을 실감한다. 몸을 옆으로 돌려 거울을 보니 두꺼운 가슴보다 더 앞으로 솟아오른 D자형 배가 거슬린다.
매일 운동을 해도 이렇게 하루만 거르면 엉망진창이 되는 몸을 보며 내 몸이 저주스러워진다. 하지만 결국 식이요법을 병행하지 않는 가벼운 운동으로는 다이어트와 몸매관리는 요원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의지박약으로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자기비하로 생각이 달려간다. 왠지 자기부정으로 치달을 것 같은 우울한 심정에 대충 생각을 털고 재빨리 사무실로 돌아가 모니터에 집중을 한다.
9:00
이제 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집중력에 괜히 인터넷 뉴스를 뒤적여 본다. 심각한 뉴스보다는 가십거리를 읽으며 밍기적 밍기적 일할 마음의 준비를 해 본다. 머리와 몸의 절반의 세포가 아직도 잠자고 있는 듯한 이 부유감에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 처럼 먹먹하기에 오늘 하루는 최대한 조용히 사건 사고 없이, 갈등 없이 지나는 것이 지상과제다.
슬슬 눈치를 보며 힘든 일은 가급적 뒤로 미루고 쉬엄쉬엄 할 수 있는 일들을 우선적으로 정리해나가며 오전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회사의 스케줄이 언제 내 마음대로 된 적이 있었던가. 담당 임원의 호출에 허둥지둥 달려간다. 담당임원의 표정을 살피며 수명사항을 기다리자니 눈 앞에 일전에 보고했던 보고서가 보인다. 저 보고서를 작성할 떄만 해도 오류나 누락은 없이 완벽히 작성했다고 자신했지만, 지금에서야 갑자기 부족한 점들이 떠오르며 불안해진다.
역시나 담당임원의 지적과 보고서 수준이 낮은 것에 대한 비난을 한 껏 듣고 나서야 오후에 다시 정리해서 보고를 하라는 지시사항을 듣고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굴을 두 손으로 싸매고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오늘 하루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12:00
점심시간이 돌아 왔지만 담당임원의 지시사항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밥을 먹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일의 속도가 나지 않아 더욱더 일의 진행은 더디게 시간만 지나간다. 하지만 아침부터 뭐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한 위장은 기가 막히게 점심시간임을 아는 건지 아우성을 친다. 이대로 있다간 속이 쓰려 녹아버릴 것 같아 대충 먹고 오기 위해 사무실을 둘러봐도 이미 삼삼오오 밥을 먹으러 나가고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에 혼자 터덜터덜 구내식당으로 향한다.
하필이면 이런 날 구내식당 메뉴에는 제대로 된 국물은 없고 돈까스가 나온다. 결국 대충 밍밍한 국이나마 몇 숟가락 뜨고 나서 대충 속만 달랜 채 다시 사무실로 무거운 발을 옮긴다. 이제 겨우 절반의 하루가 지났지만 몸과 마음이 바닥을 뚫고 내려갈 것만 같다.
14:00
한창 일과 시간에 갑작스레 아내의 전화가 온다. 이 시간에 전화할 일이 별로 없기에 의아스럽게 전화를 받아 본다. 역시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오늘은 왜 그러나 싶어 이야기를 듣자하니 결국 집을 알아보다 이런 저런 짜증이 난 것이다.
한참을 이야기봐야 답이 없음을 알지만 절박한 심정의 아내는 나에게 어떤 답을 얻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평범한 회사원에게 뻔한 월급으로 당장 큰 돈이 나올 구멍이 있을리가 없다. 결국 와이프의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과 함께 통화는 끝난다. 그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파고 나의 무력함을 끌어 올린다.
난 지금 내 인생에서 어디 쯤 서 있는 걸까. 이 길이 정말 맞는 건지 모든 게 의심스럽고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16:00
어떻게든 보고서를 마무리 해서 보고를 했다. 담당임원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 보였지만 대표이사 보고 시간이 다 되었기에 일단 통과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될 문제려니 하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해본다.
오후가 되면서 슬슬 몸의 컨디션은 돌아오고 있었지만 지친 마음은 여전히 일 할 의욕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냥 어서 집에 가서 몸을 뉘이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내 기대는 역시 담당임원의 전화가 울리며 무참히 무너졌다. 대표이사실로 올라오란 이야기에 관련자료를 싸들고 서둘러 달려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 역시나 분위기는 무겁다. 몇 가지 질문과 답변, 약간의 꾸지람이 오갔던 것 갔지만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내 말도 조급한 마음을 반영해 빨라지기만 할 뿐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혼돈의 시간이 어찌어찌 지나고 나서 사무실로 돌아오니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간다.
나보다 한 박자 늦게 자리로 돌아온 담당임원의 표정도 여전히 좋지 않지만 작은 한숨과 함께 대표이사께서 지시하신 내용을 정리하란 말 외엔 별 말없이 돌아가더니 이내 정리를 하고 퇴근을 했다. 역시 나 뿐만 아니라 저 추상같은 담당 임원 조차도 대표이사 보고는 부담스러운 거겠지.
지금 내가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주어진 미션과 다가오는 퇴근 시간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21:15
결국 내일 아침 당장 보고를 해야 할 보고서를 작성하고 나니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났다. 대체 이렇게 해서 주52시간을 어떻게 지키며 앞으로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일은 시급을 다투지만 정해진 시간에서만 일을 해야 하다니...효율성을 높이면 된다지만 이건 정말 회사생활을 안해 본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답답한 이야기다. 야근이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어쩌란 것인지. 물론 사람을 많이 뽑아 일을 나누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이지만 그래봐야 결국 회사가 어려워지면 무의미한 이야기고...현장에 있는 사람만 고생이다.
이상한 상념을 떨치고 이제야 늦은 퇴근을 준비한다. 이쯤되니 내일 보고가 어찌되든 에라 모르겠다 싶다. 이젠 정말 몸도 지치고 머리는 고갈되버린 것만 같다. 생각해보니 저녁도 안 먹었다. 어쩐지...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회사를 나선다.
22:40
대충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주먹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집으로 들어선다.
이런 늦은 시간에 퇴근을 하면 버스와 지하철에서 자리가 없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은 좋다. 하지만 취해서 고기 냄새와 술 냄새를 온 사방에 풍기거나 고성을 지르며 통화를 하는 취객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단점이다.
책을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줄곧 눈을 감고 최대한 휴식을 취한다. 어차피 불편함에 잠은 오지 않지만 지금은 무조건 쉬어야 한다. 손 끝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집으로 들어서자 아이들은 이미 잠들었고 집은 어둑어둑하다. 대충 씻고 잠자는 아이들을 잠시 들여다 본다. 괜시리 아이들에게 미안해진다. 내가 이 아일들을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지 왠지 자신이 없어진다. 이 아이들의 남은 인생에 내가 부모로써 좋은 영향을 주고 많은 유산을 물려줄 자신이 없기에 미안하고 불편하고 슬퍼진다.
오늘을 아내도 집에 오지 못한 터라 노모가 아이들을 재우고 집을 치우고 있다.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뿐이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아들이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천근만근이기에 대충 어머니께 인사 드린 후 잠자리를 찾아들어간다.
어머니 역시 피곤해보이니 쉬라는 말씀만 할 뿐 별말 없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누워 계신다.
23:15
피곤함에도 복잡한 머릿 속 생각들이 잠 드는 것을 방해하여 뒤척거리고 있자니, 밖에서 어머니께서 내일 어린이집 준비물을 챙기며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제서야 아차 싶지만 다시 일어나기엔 내 의욕과 의지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척 까무룩 잠이 든다.
모든 것이 나의 통제를 벗어난 채 엉망진창으로 흘러간 하루였다. 내 삶이 가진 허상과 모래성 같은 불안정함이 적나라하게 들어났다.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선택하는 순간에 직면 한 것처럼 이 밤이 끝나고 나는 내 생을 어떻게 바라볼지 알 수가 없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면 시간에 고민은 흘러가고 불안은 풍화될 것이란 막연함만이 내가 알 수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