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되는 것이 꿈은 아니었다. 많은 교사들이 그렇듯 성적에 맞춰 안정적인 직업을 바라는 부모님에 등 떠밀려 교사가 되었다.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큰 고민이 없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남들처럼 임고를 보니 어느새 교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다가도 금방 적응했다. 내가 배웠던 대로 남들 하는 대로
'그냥 잘 가르치면 되지. 뭐 초등학교 내용이 별거 있어. '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교실은 온전히 나의 공간이었다. 그게 보이기 시작하자 조금씩 버거워졌다. 그렇게 혁신학교를 만났다.
혁신학교에서 나는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서 내가 가르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시간을 넘어,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던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기 시작했다.
딱딱한 책상과 의자에 앉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교실 속 수업에서는 그 아이들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아이들은 다양한 활동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빛났다. 관계 맺기는 교실과 교실 밖에서 더욱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교실을 넘어서 더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새 학기의 첫날은 언제나 긴장이 감돈다. 어린이들도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될지, 담임 선생님은 누구일지 긴장하지만, 사실 선생님도 마찬가지이다. 흥미로운 점은 저학년 교실과 고학년 교실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 저학년 교실은 분주하고 산만하다. 아이들은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기 자리를 찾거나, 친구를 찾아다니며 이야기하는 데 열중한다. 반면, 고학년 교실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아이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긴장된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본다.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의 긴장감이 전해진다.
6학년 담임을 맡은 첫날, 교실 뒤 쪽에 앉아있는 A에게 눈길이 갔다. 회색 후드티를 입고 있던 A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 '모자 벗지 않을래?'라고 하자 A는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저었다. 아직 A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섣불리 말하는 것보다는 기다려보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래 알았어.'하고 자리를 떠났다. 첫날 이후로도 A는 후드를 벗지 않은 채 구석에 있었다. 마치 스스로를 가리고 싶어 하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면서 다가가기 어려운 모습에 조금 걱정도 되었으나 학급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혁신학교에서는 학기 초에 '학급 세우기'라는 활동을 통해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학년 초 금요일 저녁, 관계 맺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학년 전체가 참여하는 학교 야영을 했다. 저녁을 함께 만들어 먹고, 운동장에서 피구와 줄다리기 같은 활동을 하고, 교실로 돌아와 야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학교에서 하룻밤 자는 활동이었다. 활동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해하고 긴장감을 내려놓는다.
그날, A에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왔다. 저녁 8시쯤 깜깜해진 운동장에 조명이 켜지고 피구를 하기 위해 어린이들이 운동장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환한 얼굴로 A가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전까지는 항상 표정 없는 얼굴로 교실 한 구석에 앉아 있었던 A였기에 그 모습이 주는 충격은 컸다. 이후로도 A가 그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깨달았다. 교실에서 보는 모습만이 아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다양한 공간과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그 빛나는 순간들을 교실 안에서만은 모두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활동이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에 모여 잠들 준비를 하던 중, A가 침낭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침낭을 내밀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결국 몰래 침낭을 덮어주고 나왔는데, 다음 날 아침, A는 침낭을 곱게 접어 주며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A가 먼저 건넨 첫마디였다.
그날 이후, 나는 A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A도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학급 생활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는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야영 이후 친구들과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 나누며 소통했다. 학급이 함께 협력하는 활동에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그런 작은 변화들이 A와의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주었다. 누군가는 '교실에서 모자를 쓴다니 안 되는 건 안된다고 잘 가르쳐야지.'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A는 모자를 쓰는 것 이외에는 학교생활에 다른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친구들과도 잘 지냈고 나와도 문제가 없었다. 모자를 벗기 싫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존중해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 자체를 인정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 우리 교실은 그런 공간이라고.
너를 너로서 존중하고 받아주는 곳.
아이들과 신뢰와 관계를 맺는다는 게 꼭 거창하고 복잡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이 경험으로 정말 많이 배웠다. 어떻게 보면 색안경을 끼고 아이들을 바라봐 왔던 건 내가 아니었을까. 학교에서 교실에서 내가 만나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어린이들의 모든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B는 평소 활달하고 밝은 성격으로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수학 시간이 되면 누가 봐도 위축된 모습으로 변하곤 했다. 항상 수업에서 자신감 넘치던 모습과는 반대되는 태도에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날 방과 후에 나는 B에게 물었다. "선생님이랑 한 번 공부해보지 않을래?" 그날 이후 B와 몇몇 아이들이 방과 후 교실에 남아 함께 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B는 이전에 놓쳤던 수 개념을 새로 익히고 구구단도 다시 외우며 부족했던 곱셈 연산을 반복 연습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감을 되찾았고, 수학 시간에도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B는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데는 자신감이 있는 아이였지만, 모른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위축되는 아이였다. B와 공부를 하면서 B의 이러한 면을 알게 되었고 보호자에게도 약간이 선행학습이 B의 자신감을 키워주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반대로 C는 교실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며 발표를 할 때도 늘 묵묵부답이었다. 만난 지 3개월이 되어가도록 C의 목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런 C가 언제부터인지 아이들과 함께 남아 수학공부를 시작했다. 함께 남아 공부한 지 세 번째 날 때쯤, C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신선했고 감동적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았는데, C는 친구들 한 두 명과 있을 때는 수다쟁이라는 것이다. C는 마음을 열고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아이였다. 이후로도 C는 교실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방과 후의 작은 활동 공간에서는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혁신학교에서 업무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학급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어린이들 한 명 한 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진짜 관계가 맺어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교실 안에서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아이들을 바라봤지만, 이제는 수업과 다양한 활동 속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빛나는 순간들을 온전히 마주하게 되었다.
학급에서의 일상을 넘어 야영, 학급학년 행사(어린이날행사, 알뜰시장, 동아리 발표회 등) 방과 후의 소소한 활동 같은 다양한 기회들이 아이들에게는 성장의 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빛난다. 누군가는 밝고 활달한 성격으로, 또 누군가는 자기만의 속도로, 또 다른 이는 소극적이지만 깊이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속도와 개성을 존중하며 기다려주는 것이다.
관계는 기다림과 존중 속에서
하나씩 쌓여간다.
서두르지 않고 아이들의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며,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 신뢰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런 관계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며 성장하고, 선생님과 아이들 간의 유대도 함께 깊어진다. 나는 관계 맺기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믿는다. 믿음과 존중으로부터 출발하는 관계는 결국 아이들이 앞으로 스스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큰 힘이 된다.
혁신학교에서 경험한 관계 맺기는 단지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교사인 나 역시 '존중과 기다림'을 통해 교실을, 우리 반 아이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배우게 되었다.
가르친다는 일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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