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선 Jun 04. 2024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마법의 약물치료

기분 조절제와 함께 살아가기

내 짝꿍은 나한테 너는 분노에너지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날도 가족들 때문에 화가 났다. 화가 난 것까지야 일상인데, 얼마나 화가 났던지 이틀간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즈음 나는 면역력이 약해져 조금만 피곤해도 입술이 진물과 딱지로 덮여 입을 벌리지도 못하고, 온몸에 염증 반응이 일어나 벌겋게 되고 간지럽게 되곤 했다. 건강문제로 퇴사를 할 정도였는데, 이틀 내리 잠을 못 자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냅다 정신의학과를 찾아가 잘 수 있는 약을 달라고 했다.


달라고 한다고 정신과 약을 처방받을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나는 믿는 구석이 좀 있었다. 우울했지만 사춘기라서 그렇겠거니 했던 십 대를 지나, 이십 대에도 나는 어마어마한 감정기복을 겪곤 했다. 나는 나의 상태를 이해하고자 업된 상태일 때와(mania) 우울한 상태(blue)의 일기를 따로 이름을 붙여 싸이월드에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유치하긴 했다.) 장애를 가지고 있던 나의 큰아버지 역시 조울 비슷한 증세가 있으셔서 한번 업되면 며칠씩 잠도 자지 않고 잘 드시지도 않고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말씀하려 시도하셨다. 그러다가도 우울해지면 며칠씩 꼼짝도 않고 누워 계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도 그러한 감정기복의 패턴을 관찰했고, 내게서도 문제 증세가 발견되고 있음을 알았으나 아직 정신과의 문을 두드리기를 두려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의사는 내게 어떤 진단명을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나긴 검사와 그보다는 짧은 상담 끝에, 의사는 쾌활하게 나에게 잘 수 있는 약을 주겠다고 했다. 내 예상과 달리, 수면유도제는 아니었고, 신경안정제와 기분조절제였다.


주변에서는 약을 먹게 되는 것에 엄청난 우려를 표했다. 나중에 직장에서 불이익받으면 어떻게 해? 차별받으면 어떻게 해? 너 그러다 중독되면 어떻게 해? 못 끊으면 어떻게 해? 하지만 정말 웃기는 일이다. 아픈 사람이 약을 먹는데 왜 불이익과 차별, 중독을 걱정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중독 파트가 웃기는 일이다. 고혈압과 신장병으로 약을 오래 먹고 있는 간호사 출신 엄마가 똑같은 말을 했을 때 나는 정말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아하하하, 엄마. 고혈압과 신장병 약을 언젠가 끊을 걸 전제로 먹는 거야? 건강에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계속 먹는 건 똑같은데 왜 정신과 약은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거야 말로 차별이야.


말로는 우울감은 정신의 감기 같은 거라고들 하면서, 막상 내 주변인이 약을 먹는다고 하면 걱정을 하는 모순.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들이다.



약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코로나가 터졌다. 온세계가 우울감에 휩싸였다. 나는 주변인들에게 상담과 약처방을 권유하고 다니곤 했다. 그게 잘 맞는 사람도 있었지만, 잘 맞지 않는다며 중도 포기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개중에는 내가 다니던 연구소의 이사님도 있었는데, 이 분은 10년 넘게 우울감 때문에 많은 일과 관계, 논문을 망쳐오고 계신 상태였다. 나는 틈날 때마다 약을 먹기 시작한 이후로 '사람의 의지로 사는 게 아니라 약을 먹으면 다 쉬워진다', '아침에 그냥 눈이 떠지고 몸이 일으켜진다', '청소 설거지 하나하나 도전이었던 과거와 달리 마음먹으면 그냥 할 수 있다'와 같은 것들을 설파했다. 고민하시던 이사님이 상담을 받고 약을 드시기 시작한 어느 날 내게 와서 조용히 웃으셨다. "진선 씨, 내가 10년 만에 밥을 먹는데, '맛있다.'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라니까. 너무 고마워요." 그날 이후로 숨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내가 약을 먹고 있다는 걸 숨기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 나는 늘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 서서 싸우는 운명인가보다.'하는 체념과 함께.)



물론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중3이후 15년간 몸무게에 변화가 없었는데, 약을 먹기 시작하며 대뜸 1년 사이에 8킬로 가까이 살이 쪘다. 하지만 코로나 시즌과 겹치는 바람에 잘하고 있던 수영을 그만두게 되었던 것과, 마침 서른이 막 되었던 점 때문에 주변인들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운동을 갑자기 그만둬서 그런가 보다. 나잇살인가 보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해서 그런가 보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면서도 약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코로나가 종료되어 일상에 복귀를 한 작년에도 계속 살이 찌고 있음을 눈치챘을 때야 살이 찌는 것이 약의 부작용인 것을 알았다.


무릎관절 때문에 더 살이 찌는 것은 곤란했다. 식욕을 억제하는 약으로 바꿔보려고 약의 종류와 용량을 바꾸길 몇 차례 시도했다. 약을 바꾸는 건 엄청난 모험이었다. 약을 바꾼 직후 두세 번 정도는 제때 일어나지 못해서 출근을 못하고 급하게 재택근무로 돌리기도 했다. 기분조절제가 효과가 없어서 불안 증세가 심해질 때에는 신경안정제를 먹었음에도 강의 전날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다. 불안한 상태로 강의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계속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를 동료들이 열심히 달랬다. 이대로는 일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 다시 원래 먹던 약과 식욕을 억제해 주는 약을 병행해서 먹기로 결정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내 신체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다.



남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남에게도 관대한 사람이 되자.

그걸 늘 다짐하면서 저녁마다 약을 먹는다.

편안하고 불안하고, 감정의 파도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면 임신 기간에는 이 약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렵다. 불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울하고, 날카로운 나를 그대로 직면해야 하는 그 10개월이 너무나 공포스럽다. 내가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내 직장 동료들은 나의 그런 모습을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내 일에는 지장이 가지 않을까? 닥쳐오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신체적으로도 가장 약해져 있을 때, 정신적으로도 가장 약해져 있을 모습이 너무나 겁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 약으로 커버를 치고 있는 지금 내 모습은 가짜 모습인 건 아닐까? 하고. 너무 깊게 생각하면 우울해져서 예술을 하기엔 좋겠지만 생산성은 떨어진다고 했던가. 그때가 되면 발견할 나의 모습은 그때로 미뤄놓고, 지금의 과제는 그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서서히 약을 줄여나가는 연습을 하는 것일 게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기분조절제와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 같다.

내 고민을 살짝 덜어주는 그런 친구랑 살아가는, 뭐 그런 거.

모든 약을 먹는 사람들을 응원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이도 저도 아니라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