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큰아빠에 대한 이야기
내가 여자 ROTC 2기로 지원하겠다며, 패기 넘치게 직접 높으신 분을 만나러 가서 문제집과 체력 훈련에 대한 설명을 1:1로 듣고 돌아왔던 날. 엄마는 당연히 집을 나가라고 뒤집어졌다. 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집안에서, 안 가도 되는 여자애가 일부러 골라서 간다니 거의 반역에 가까운 행위였으니까. 아빠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이랑 좀 달랐다. 나를 불러다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너, 군대가 어떤 조직인지 모르지?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멋있는 거랑은 거리가 멀어. 온갖 부당한 일이 일어나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 하는 곳이야. 너는 거기서 버틸 수 없을 거야. 가지 마.
하지만 아빠는 아빠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여자 ROTC에 지원하려는지 깊은 설명을 서로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로 지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답답했다. 내 정당한 분노가 계집애의 히스테리로 이해되고, 내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 모든 상황이 이상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대학교에서 남자애들하고 부딪힐 때마다 무슨 말을 하면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아서, 어려서, 여자애라서 그렇다고 자꾸 깎아내려지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콱 씨, 니들이 그렇게 쫑알대는 군대, 나도 한번 갔다 온다. 평생을 어떤 방식으로든 소수자로서 정의 내려지는 삶을 살았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사회'에 편입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내가 평생을 몸담아왔던 부모님의 종교에서 벗어나서 주류사회에 들어가고자 애쓰고 있던 중이었다. 소수종교만 벗어난다고 주류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그때 이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아빠의 군대에 대한 감각은 어땠는지, 나는 그 이후로도 한참 물어보지 않았다. 가끔 아빠가 군대이야기를 하면 특유의 반골 기질이 드러나서 그냥 놀려댔을 뿐이다. 아빠는 남이 신던 신발에 손 넣기가 싫어서 선임 군화 닦으라는 걸 안 닦았어. 그래서 동기들 다 같이 집합해서 두드려 맞은 적도 있어. 그런 이야기에 우리 남매는 한참 웃었다. 뭐야, 아빠 고문관이었잖아. 동기들이 되게 싫어했겠다.
이번에 피스모모에서 호국보훈의 달에 대한 메시지를 쓰려고 기억을 더듬고 더듬다 보니 큰아빠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군대에서 뇌를 크게 다쳐 국가 유공자가 되었던 큰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막 3주짜리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시차적응을 하고 있던 아빠에게 냅다 전화를 걸어 물었다. "그동안 어른들이 다 이야기를 피하셔서 금기인 줄 알고 우리도 이야기한 적 없는 건데 말이야. 불편하면 이야기 안 해도 괜찮아. 우리 사무실에서 호국보훈의 달에 대한 메시지를 쓰려고 하고 있거든. 큰아빠가 국가유공자였잖아. 어떤 스토리가 있었는지 한번 들어보고 싶어."
그렇게 아빠와 나는 처음으로 큰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래는 아빠와의 대화 녹취록을 다듬은 내용이다)
사실 옛날엔 안 친절해서, 군대에서 다쳤습니다라는 통보외에는 별로 받은 게 없어. 아빠가 고3 때였을 거야, 아마. 수도통합병원에서 연락이 온 거지. 등촌동에 군인들이 다니는 병원이 있어. 그래서 거기에 병원에서 입원을 한 상태에서 전화를 받은 거야. 그때 연락도 이제 할아버지한테 오고 할아버지가 주로 처리하셨으니까 나는 옆에서 들은 거밖에 없는 거지. 근데 사실은 자기 거기 말로는 2층에서 작업을 하다가 떨어졌다, 그러긴 했어. 근데 2층에서 작업해서 떨어진 것 같지 않(았어.)
큰아버지가 생뚱맞게 되게 얌전한 타입이야. 그래서 (친구들한테) 별명이 미스김이었거든. 그런 성격인데 군대 가서 그냥 고생하다 나오면 그렇다고 뜬금없이 운전을 배우겠다고 운전병을 지원을 했어. 근데 그 운전병이 예전에는 뭐라 그럴까 좀 질이 안 좋은 거지. 고등학교 나와서 할 일이 없으니까 운전을 배워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아서, 좀 험한 직업이었어. 거기 있는 아저씨들 입장에서 보면 샌님 같은 성격에 대학교를 다니다 온 큰 아버지를 호의적으로 대하기 어려웠겠지. 하여튼 이건 추측이야.
다쳤다고 연락이 왔잖아. 근데 병원에서 수술을 해야 되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군 병원 의사들 오죽해. 할아버지가 친구들을 수배해서 외과의사를 섭외해서 수술을 해서 살렸지. 등급이 조금씩 바뀌는데, 좌반신불수라서 왼쪽 팔과 다리를 아예 못쓰니까 특급이었다가, 1급이 되었다가 했어. 일정 연금도 나오고, 병원비 지원도 되고. 제대할 때까지 육군 수도통합병원에 있었다가 원호병원이나 이런 데에서 치료를 했지.
치료비 지원만 해도 크고, 나머지 이런저런 혜택이 있는데 실제로 써먹은 건 별로 없고. 글쎼, 그렇다고 그게 국가에 고마워하고 그럴 일 인지 까지는 잘 모르고. 필요해서 도움은 받았던 것 같아.
(의문이나 이런 건 없었냐는 나의 질문에)
그거 요즘 얘기지 그 당시에는 그냥 다쳤습니다. 그러면 끝이야. 요즘에 의문사 사건 나오는 것 중에 김소위 사건이라고, 아버지가 별 하나 준장이야. 근데 자살했다고 통보를 받았거든. 사실 총기사고로 죽은 건데 그게 밝혀진 게 2000년대 들어와서 밝혀졌어. 아버지가 준장인데도 그랬어. 그때는 뭐 맞아서 다쳤는지 옥상에서 떨어졌는지는 별로 안 중요했거든. 우리 입장에서는 사람이 다쳤는데 그걸 캘 수도 없었고 캘 이유도 없고 캘 방법도 없었고. 그냥 그랬어.
요즘에 국방부 장관인가 해병대 사령관이 그랬다며. 군인은 필요하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고. 그건 헛소리가 맞는데. 옛날에 수도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부모들끼리 그런 이야기하는 거지. 군대에서 죽으면 갯값이라고. 의미가 없다는 얘기지. 뭐 옛날에는 그러고 그냥 살았어.
이번 통화 때는 아빠와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그 일로 아빠를 군대에 보냈을 때에도 굉장히 긴장하셨을 것이다. 총명했던 큰 아들을 좌반신불수에 말도 똑바로 못 하는 장애를 갖게 만든 군대. 국가에 단 한 번도 항의할 생각도 못하시고 평생을 모든 식사에 반주를 하며 사셨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빠가 군대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영향력을 총동원해서 아직 자대에 배치받기도 전의 아들에게 편지를 쓰셨댔나 그랬다. 아빠는 군대에서 엄청난 빽이 있는 놈이라고 소문이 나서 고문관 짓을 해도 본인이 맞는 것이 아니라 동기들이 대신 굴러주는(?) 생활을 보냈다며 약간 농담조의 이야기만을 가끔 하셨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큰아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큰아빠를 많이 그리워하셨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리 좋은 대학이 아니었음에도 엄청 어화둥둥 예뻐하셨는데, (안 그래도 손주 중에서는 내가 제일 예쁨을 많이 받는 첫 친손주긴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아빠랑 같은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큰아빠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음에도 내가 그렇게 선택을 했던 건 어떤 운명이었을까. 무사히 살아계셨더라면 우린 캠퍼스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수다를 떨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부 더 열심히 해라, 취업 더 좋은데 해라, 명절 때마다 내게 잔소리를 하시고 반항을 하며 싸우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가능성을 빼앗아 간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
고사리 손 어린아이들까지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국기에 맹세시키던 나라에서. 말도 안 되는 죽음들을 계속 목도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나.
개인적으로는 4.16 사건으로 출발했고, 일본군'위안부'와 같은 역사 속 사건들을 쭉 돌고 돌아 결국 내 가족의 일로 왔다는 것이 너무 기분이 이상하다. 도대체 안전이란 무엇이고, 그 안전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왔을 아빠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어제 통화 중에 속상해서 훌쩍이는 내 목소리에 아빠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아마 아빠도 무언가 감정이 울컥 올라와서였던 것 같다. 내가 아빠도 정신과를 가든 상담을 받든 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아빠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마주할 준비가, 이야기를 꺼내놓을 준비가 안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사회적 트라우마를 개인의 감정 문제 정도로 치부하고 어딘가에 밀어 넣어놓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 사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치유의 한 과정으로 언젠가 아빠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고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같이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덜 아픈 세상 되었으면 좋겠다.
피스모모에서 업데이트한 호국보훈의달 메세지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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