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활동기일까 내 일기일까 헷갈린다 이제
나는 지금도 내가 여기서 꺾여서 빨리 일을 그만두기를 대놓고 기다리는 엄마를 갖고 있는데. 내가 종교를 그만두고 나서 홀가분하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던 시절에 친구를 통해서 "네가 너무 행복하면 엄마는 불행해진다."라고 전해 듣게 하던 그런 엄마. 애증의 모녀관계. 오랜 친구들은 비건/퀴어/페미니즘/반군사주의 같은 단어를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를 낸다. 내 짝꿍은 내가 하는 활동을 잘하라고 지원은 해주지만 관심은 없다. 내 에너지는 사람들로부터는 채울 수 없는 것이다.
뭘 하든지 간에 우리 집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아왔다. "우리 엄마는 나를 포기한 지 오래예요." 얼마 전 공동체 상호상담에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내 부모 또래쯤 되는 한 다른 상호상담 참여자가 한마디 하셨다. "아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도대체 왜..." 지나가는 말이지만 너무 고맙고 위로가 되는 말이라서 나는 며칠 동안 그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단물이 나오지도 않을 때까지 그 말을 계속 생각하며 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나에게 속삭였다. 그래, 나는 그렇게 퍼즐 조각을 모으듯이 지금의 내가 하는 일을 위한 힘을 모아 왔다.
내 주변엔 내 기준으로 대단한 성취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모든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것은 아니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부모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지지를 받고 있다. 첫 번째로는 심리적인 지지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가능한 경우라면 재정적으로도 지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재정적 지원이 전혀 없는 경우더라도 심리적인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친구들이 많은데, 이 친구들은 본인이 받았던 그 든든한 지지와 사랑을 주변에도 아낌없이 나눠주며 나를 성장시키기도 한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친구 G.
나는 부모님의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대학생 때까지 정치적인 영역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시민사회 영역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는데, 대기업을 입사를 준비하는 공간에서도 내가 맞지 않음을 느끼고, 그렇다고 중소기업 면접을 보러 다닐 때에도 "여자는 승진 안 시키는데 괜찮아요?" 같은 질문이나 받아야 하는 신세가 개떡 같았다. 때려치우고 돈은 못 벌어도 대안학교 교사를 하던가, 도피성으로 대학원이나 갈까 싶어 대학생 때 가깝게 지냈던 교수님께 추천서나 써달라고 하려고 찾아갔을 때였다. 교수님이 공부도 안 하는 애가 무슨 대학원이냐며, 당신이 운영위원으로 계시는 시민단체 하나를 추천해 주셨다.
그날 밤 스노보드를 타면서 고민을 진짜 작살나게 했었다. 고민하기가 귀찮아서 보드를 타다가 목뼈가 부러져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할 정도로. 온몸을 비틀며 과격하게 고민을 하면서 친구랑 고민을 하고 또 했는데, 결국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그 단체에 면접을 보러 가고 붙어서 내 커리어를 NGO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갈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나의 친구 G에게 그 소식을 알리며 멋쩍어하자 G는 나에게 "너무 잘 결정했어!"라고 한참을 좋아했다. 그리고 금세 덧붙였다. "네가 가지 않겠다고 했어도 잘했다고 했을 거야.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좋은 결정이라고 말해줬을 거야 나는."
아, 그때 알았다. 지난 아프고 흔들렸던 대학생활 동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G 덕분이었겠구나. 이 친구가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옆에서 든든하게 "쓸만하네"(실제로 그의 입버릇이었다)라고 말해주며 나를 무한한 사랑의 힘으로 지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겠구나. 내가 엄마아빠와의 관계의 단절을 버텨내고, 내 모든 사고방식을 차지하던 종교관을 버리고, 사랑하던 친구의 죽음을 겪는 동안 그 과정에 G가 계속 있어왔구나.
G 역시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떻게 저 작은 몸으로 그런 삶을 견뎌왔을까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모든 것을 함께 이겨내 주신 어머님의 커다란 사랑이 함께 이야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다. G가 취준생이던 당시, 면접을 보기 위해서 파란 머리를 검게 물들이려 했을 때 어머님이 말리셨던 것이 제일 압권이었다. "그 회사에 붙을지 어떨지 아직 모르는데, 그것 때문에 너의 개성을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다고 했다. G는 그래서 백화점 알바를 했을 때 썼던 검은색 가발을 쓰고 면접을 보러 갔고, 어머님의 혜안처럼 그 회사를 다니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가득 찬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 말도 오래도록 곱씹었다. 내가 직접 들은 말이 아닌데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내가 벅차오르는 그런 말이었다. 내 사랑하는 딸에게, 내 친구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이 세상에게 굽히고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일상적으로 듣고 자란 아이는 G처럼 되겠구나. 나는 G 같은 아이를 키워내고 싶다. 내가 G와 같이 되고 싶다.
요즘 주변에서 번아웃을 겪고 있는 동료 활동가들로 인해 활동을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보곤 한다. 나는 어디에서 힘을 얻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빠지질 않고 등장한다. 어디였을까.
나는 지금도 내가 여기서 꺾여서 빨리 일을 그만두기를 대놓고 기다리는 엄마를 갖고 있는데. 내가 종교를 그만두고 나서 홀가분하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던 시절에 친구를 통해서 "네가 너무 행복하면 엄마는 불행해진다."라고 전해 듣게 하던 그런 엄마. 애증의 모녀관계. 오랜 친구들은 비건/퀴어/페미니즘/반군사주의 같은 단어를 듣기만 해도 진절머리를 낸다. 내 짝꿍은 내가 하는 활동을 잘하라고 지원은 해주지만 관심은 없다. 내 에너지는 사람들로부터는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러니 지금까지 그래왔듯 퍼즐을 맞추듯 주변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를 주워서 스스로를 채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마치 한번 꺾여서 충전이 느리게, 가끔 되지 않을 때도 있는 핸드폰 충전기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걸. 조각난 말을 주워서 오래도록 생각하고, 혼자서 글을 쓰고, 혼자서 울고 웃으며 채워나갈 테다. 그리고 오래오래 버텨낼 거다. 나중에는 그렇게 버텨낸 사람이 이긴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