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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Sep 19. 2023

열에 아홉이 나를

소수종교에서 벗어나기 ③

"가정 폭력에 노출되었을 때, 내가 잘못한 건 아닌지 계속 인터넷에 검색해 봤었잖아요. 계속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오늘 동료 활동가가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하마터면 오열할 뻔해서 한참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나는 특수한 케이스라(고 생각하여) 검색조차 해 볼 엄두도 못 냈지만, 누구라도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이 너무 절실했던 시절이 길었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10만 명 정도의 공식 신도(이 글이 쓰인 2023년 9월 기준)를 가지고 있는 소수종교를 믿고 있다.


두 사람은 종교와 폭력(이 문제는 추후에 다뤄볼 예정이다.)만 제외하면 너무 이상적인 부모에 가까웠다.

일상에서 비교를 당한다거나 하는 사소한 문제조차 었다.

(우리 남매는 늦잠으로 각각 고등학교 내신 시험/대학입시 논술고사를 못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교대근무를 하느라 깨워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지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딪히게 될 때는 어땠나?

종교라는 렌즈가 덧씌워진 엄마의 눈에 우리는, 특히 나는 언제나 모자랐다.

그럼 내가 뭔가 잘못을 하고 있던 걸까?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도 부르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최대한 내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썼지만, 애들의 시선은?

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뒤통수가 따끔거리고, 숨이 가빠지고 어지러웠다.

일요일 저녁에 자려고 누울 때마다, 아침에 교통사고가 나서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는 상상을 했다.


매주 주말이면 2시간씩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다.

어쩌다 반 아이라도 만나고 난 뒤에는, 하루 종일 그 애가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 애가 나를 알아봤을까? 뭐라고 생각했을까? 누구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을까?

어른들은 방학을 하는 한겨울과 한여름에는 특별히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전도하기를 원했다.

나는 혹독한 추위와 혹독한 더위를 야외에서 보내는 방법을 익혔다.


피를 멀리하라는 말씀에 따라 급식에 순대가 나오면 먹지 않았다.

방과 후 떡볶이를 먹으러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순대를 입에 댄 적이 없다.


학교 숙제는 못해가도 평일 2회, 주말 1회에 걸쳐 모이는 '집회' 때마다 성경 말씀을 예습했다.

엄마가 손을 들고 발표를 하라고 하면, 남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너무 무서워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 대신 침을 몇 번씩 삼키며 발표를 했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내가 모임 시간 중에 졸지 않기를, 더 많이 필기하고, 더 많이 대답하기를 원했다.

내게 자꾸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더 많이 전도하고, 더 신앙심이 강해지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내 인생조차 사랑할 수 없어 다른 무언가를 사랑할 여력이 없었다. 


늘 다른 사람의 폭력적인 시선에 노출되어 겁에 질려 있는 나에게

부모님은 야단을 칠 때면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길 가는 사람 열 명 붙잡고 물어봐봐. 아홉 명이 내가 맞고, 네가 이상하다고 하지."


내가 스물한 살이 되어

도저히 못 견디게 된 어느 날 결국

"길 가는 사람 열 명 붙잡고 물어봐봐. 엄마아빠가 사이비라고 하지!"

라고 소리치는 날까지 

나는 속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네가 다 잘못했어. 너 때문에 엄마가 불행해지잖아. 이 식충아, 너 때문에 엄마아빠 수명이 10년은 줄어들었겠다.(실제로 남동생에게 들었던 말.) 너 같은 거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아니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억지로 하는 일을 잘 못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이야?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되잖아.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엄마의 행복을 내가 책임지고 싶지 않아. 잠깐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어. 엄마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가끔 이런 고통이 새어 나올 때면 주위 사람들은 말했다.

너, 너희 부모님 만한 부모님 없어. 얼마나 좋으신 분들이니? 복에 겨웠네. 애가 못되어 가지고.


내가 분열되는 느낌, 어디에도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느낌,

나는 사랑받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숙명이리라고 생각했다.

누가 한 명 죽어야 끝나는 그런 치킨 게임 같은 거라고 말이다.

나는 점점 공격적이고, 사회부적응자 같은 아이로 자라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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