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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Oct 11. 2023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않을 것이다?

가정폭력 인정하기①

"아이를 징계하기를 주저하지 마라. 매로 때려도 죽지 않을 것이다." (잠언 23:13)

 *번역본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번역이 일반적이다. 본문에는 내 부모가 읽던 번역본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으나, 제목은 일반적인 번역에 따라 잡았다.



가정폭력의 무서운 점 중 첫 번째는 '자신이 당한 것이 폭력인 지 모른다'는 점이다.

부모도 자식도 이것이 체벌이었다고 정당화하기 위한 기제를 넘치도록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파트너와 언젠가 결혼을 꿈꾸며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체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어느 정도는 체벌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주장을 펼쳤다.

파트너는 깜짝 놀라서 내게 질문했다.


"세상에 맞을 짓이 어디 있어?"


멀리서 찾을 필요가 무엇이 있을까. 우리 대부분이 직접 겪어왔다는 것을 안다.


시작은 사소해도 괜찮다.

부르면 네 하고 와야지, 옷장문과 서랍 좀 닫아놓으라고 했잖아, 어디서 눈을 그렇게 동그랗게 뜨고 쳐다봐? 너 이리 와. 몇 대 맞을래? 왜 대답을 안 해?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너 사과할 때까지 거기 서있어. 진짜 안 할 거야? 얘가 진짜. 너 이래도 말 안 해? 가만히 안 있어? 네가 움직이니까 더 맞잖아. 처음부터 네가 얌전히 사과하고 맞았으면 한대면 끝났을 일을 왜 늘리니? 네가 잘못한 거야. 너를 때리는 내 마음은 편하겠니?

끝이 사소하면 그것도 괜찮지만 우리 집은 그렇지 못했다.


처음에는 매로 때린다. 조금 더 화가 나면 손에 잡히는 것으로 때린다. 옷걸이, 빗자루, 배드민턴 라켓, 함께 아지트를 만들겠다고 주차장에 기대 세워놨던 각목. 분노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게 되면 물건이 날아다닐 수도 있다. 라디오, 청소기, 송곳. 아이가 아끼는 것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게임 CD, 게임기, 키보드, 컴퓨터, 교복, 햄스터(살해미수). 때리는 방법도 좀 더 격해진다. 물건으로, 손으로,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되면 발로, 때로는 목을 조르거나 패대기를 칠 수도 있다. 쾅 닫고 들어간 문에 화가 나 문에 못질을 해버리려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이웃들에게 부러움을 사곤 하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나를 만난 사람들은 가정폭력의 '가'도 떠올리지 못한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불편을 느끼지 않고, 농담과 장난을 좋아한다.

특히 조금이라도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 참지 않고 상대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성격은 정말 가정에서 그렇게 키워졌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갖춰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단 한 번도 "너 나가."와 같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이미 유치원생 때부터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보다 부모님이 더 마음 아파하고 속상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버림받을지도 모른다.'와 같은 공포를 한 번도 느껴본 적도 없다. 나는 나가라고 한다면 그대로 나가서 부모님과 기싸움을 할 생각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두 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서 단 한 번도 그런 류의 말씀을 해보신 적 없다고 웃으며 인정하신 적이 있다.


매일 저녁식사 시간이 되면, 나는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있었던 일부터 식사하기 직전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가족들은 때로는 깔깔거리며, 때로는 속상해하며, 때로는 귀찮아하면서도 잘 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친구들의 이름을, 그 친구들이 어떤 성격이며 최근 내 가족과 겪었던 에피소드가 어떤 것이 있는지 서로 잘 알았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면 가족 넷이 둘러앉아서 장기, 오목, 훌라, 화투, 원카드, 부루마블 등을 하면서 놀았다. 토요일이 오면 다 함께 피자나 치킨, 도넛, 팥빙수와 같은 것들을 직접 만들어먹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함께 동화책을 읽으며 녹음을 한 테이프도 남아있다.


학생 때까지는 나는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런 이야기만을 했다.

거짓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들은 우리 가족을 반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 다정하게 보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내 가족들은 쉽게 분노의 임계점에 도달하곤 했다.

앞서서 작성했던 예시들은 다 내게 그대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어릴 적 게임 cd나 게임기를 부수는 것 정도는 일상이었다. 대화 중 화가 나서 내가 사용 중이던 컴퓨터 모니터를 향해 머리 옆으로 송곳을 던져 강화유리에 금이 갔던 적도 있다. 키우던 햄스터들을 다 죽이겠다며 비닐에 넣고 눈앞에서 밟으려 한 적도 있다. 한겨울 주차장으로 맨발로 도망치던 나를 쫓아와서 잡히는 대로 각목을 휘두르기도 했다. 학교를 다닐 이유를 못 찾겠다는 말에는 내 교복을 가위로 찢어버리기도 했다. 문을 거칠게 닫고 들어갔다는 이유로 방문에 못질을 하려 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술에 취한 채 들어가 패대기 쳐지고 머리를 발로 차인 적도 있다.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나의 항의에 부모님은 다 너를 위한 체벌이었다고 말했다. 네가 버릇없어질까 봐, 네가 말을 안 들어서, 네가 나를 화나게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성경에서 "아이를 징계하기를 주저하지 마라. 매로 때려도 죽지 않을 것이다." (잠언 23:13)라고 하기 때문이었다고. 네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화가 나게 만드는 데 어떻게 때리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냐고. 네가 잘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었냐고.


우리는 이것이 체벌이었다 vs 아니다로 오래도록 싸웠다. 분노가 담기지 않으면 체벌일까? 손과 발이 아니라 정해진 매를 사용한다면 체벌일까? 몇 대를 맞을지 아이에게 묻고 합의를 한 뒤에 때리면 체벌일까? 폭력의 수위가 조금 높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고, 후에 사과를 하면 체벌인 걸까?


이제 나는 정답을 안다.

1. 일단 체벌이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다.

    파트너의 말마따나, 세상에 맞을 일이란 없었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누자면, 그것은 가정폭력이었다.

  아이를 위해서, 잘 가르치려고, 그 의도가 좋으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아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피해자인 내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괜찮은가? 아니다.

  성인에 비해 훨씬 작고 연약한 아이를 때린 것을 폭력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잘 컸기 때문에 그 정도는 용납할 수 있는가, 혹은 덕분에 잘 자랐는가? 아니다.

  화목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가정폭력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가? 아니다.

  상대가 화를 나게 했기 때문에 때렸으면 화를 나게 한 사람의 책임인가? 아니다.


체벌이 시작된 8세 이후로 내게 일어난 많은 일들이 가정폭력이라고 스스로 인정을 하기까지 21년이 걸렸다.

스스로가 인정하자 다음 산이 남았다. 2019년 나는 가족들을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왜 그 많은 사건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싸우는 지를 가슴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왜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원하게 되는지도.


나는 더 이상 폭력에 휘두른 뒤 자신을 탓하는 존재들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기를,

화가 났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도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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