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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선 Mar 03. 2024

엄마는 자랑을 하고 난 생활비를 아끼고?

차별의 연원 거슬러 오르기 ①

 "설에 엄마가 용돈 달라 그래서 안 준다고 싸웠잖아요."

 내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린다. 귀여운 사랑싸움(?) 혹은 투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냥 좀 드려도 괜찮잖아요. 아마 나도 우리 사이의 역사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우리 사이의 그 모진 역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에게 필요한 재정적 감정적 지원을 해 줄 용의가 아직도 충분히 있다는 점이 내겐 미스터리다.


 우리 사이 용돈의 역사는 내가 수능이 끝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전, 미성년자 시절에 나는 공주님으로 자랐고 서로 별 감정의 골이 없다. 재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단 한 번도 아쉬워본 적이 없다. 동생이랑 컴퓨터 한 대를 두고 치고받고 싸우면 컴퓨터가 한대 더 생겼고, 만화책을 사달라고 하면 만화책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당시 기준으로도 꽤 비싼 타블렛을 사주기도 하셨다. 그러더니 수능이 끝나자마자 너는 어른이라고 모든 용돈이 끊긴 것이다. 뭐, 어른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이 그때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수긍했고, 바로 과외를 구해 용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나는 일본에 있던 시절 현금 유통에 문제가 생겼던 한 달여간과 취준생 시절 반년 여간 일부 금액을 지원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용돈을 받지 않았다. 이 외에는 예외상황이랄 것이 없어서, 나는 대학교 1학년 시절 과외가 끊겨 알바를 구하던 2달여간 삼각김밥만 먹다 먹다 돈이 없어 굶던 시기가 생겼을 때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내가 점심도 저녁도 굶고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간단히 상황을 전달했을 때 엄마는 "그럼 집에 와서 밥을 먹어."라고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나는 그 2달간 4킬로가 빠졌다. 그나마도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자신의 지갑을 털어 내게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고 한 결과다.


 사실 용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만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 시기 14개월 차이 나는 나의 남동생은 1학년 때 입학했을 때는 알바처를 구할 때까지 알바를 못 구했다는 이유로 여름방학 때까지 용돈을 받고(입학 당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400만 원의 용돈이 있었음에도), 여자친구와 데이트할 때 체면을 살려줘야 한다며 틈틈이 아버지로부터 위로금을 챙겨 받고, 군대 가기 전에는 군대에 가기 전이라서,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공부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유럽여행을 갈 때에는 자신의 힘으로 모은 돈이 일부 있으니 기특하여 일부는 보태준다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님으로부터 돈을 받아갔다. 


 나는 교환학생을 갈 때에도 내 힘으로 해결을 해야 해서 기숙사비가 면제되는 일본 깡시골로 처박혀야 했다면, 동생은 적당히 아르바이트비를 모아서 유럽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한이 맺힌 내가 취직한 후 돈을 모아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겠다고 했을 때, 나의 큰 외숙모는 내 대신 서러워하며 가족 식사자리에서 눈물을 찍어내다가 우리 엄마아빠의 차 앞에 냅다 드러누웠다. "아니, 형님,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애를 유학을 보내시지 워킹홀리데이를 보내실 생각을 하세요?" 우리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졸업 시즌에 내가 한창 취업이 안되어 고민을 할 때였다. 아빠는 나를 불러다가 대학원을 가든, 공무원시험을 보든, 소득은 높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일이었던 대안학교 교사를 하든 마음껏 선택지를 열어놓고 고민을 해보라고 했다. 그 식사자리에서 엄마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싫어." 도대체 뭐가 싫단 말인지 한참을 차분하게 질문으로 대화를 끌어낸 아빠에게 겨우 꺼내놓은 엄마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해? 빨리 취업이나 하라고 해." 그리고 그날 밤 심각한 표정의 동생이 내게 와서 한 말은 이런 거였다. "누나, 엄마가 나 대학원 갈 거냐는데?"

 

 그리고 몇 년 뒤, 다행히 나도 취업을 하고 동생도 적당한 곳에 취업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동생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동생과 둘이서 엄마 명의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엄마는 당연한 듯이 동생이 지방에 발령받으면 그 집에서 나가라고 담담히 말했다. 동생은 사택을 살게 될 터였다. 나는 내 재정형편으로는 집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엄마는 잘 듣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 큰 집에서 너 혼자 살겠다고?" 나는 급하게 집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SOS를 청했고, 그중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남동생이 군대에 가 있는 친구 집에서 일정기간 지내는 것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엄마는 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럼 내가 서울에 가면 나는 어디에서 자?"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대화였다. 이 때도 외가 식구들의 얼굴 가득했던 물음표를 잊을 수가 없다. 결국에는 동생이 서울에 발령을 받게 되어 우리 남매는 그대로 엄마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남동생보다 늦게 결혼해서 늦게 집을 비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가 먼저 결혼해서 집을 비웠는데 남동생이 그 집에서 비비적대며 살다가 천천히 결혼하는 꼴이라도 봤다간 속이 뒤집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역사 끝에서도 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싶었다. 엄마에게 감정적인 이유로 엄마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지 않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나를 키우느라 고생한 노고를 무시하고 싶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분명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 언젠가 엄마는 나이가 들 거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될 것이다. 나는 그때 재정적으로, 감정적으로, 물리적으로 엄마를 케어해야 할 의무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기쁘게는 아니더라도 건강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다. 지금도 엄마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용의가 있고. 이런 마음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엄마가 갖고 싶거나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해줄 수 있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지금 용돈이 필요해?


 엄마는 대답했다. 자랑이 하고 싶어.

 

 나는 좀 참을 수가 없어졌다. 엄마가 자랑하겠다고 받아가는 그 돈이, 활동가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중요한 생활비의 일부야. 엄마 기분 좀 좋자고 나는 생활에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해. 엄마가 지금 나보다 세배를 더 벌고 있고, 나는 매달 적자가 나는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자랑을 하고 싶어?


 엄마는 다시 대답했다. 당연히 넌 내 딸이잖아. 용돈을 (당연히) 줘야지.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기력이 들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끊었고, 일주일 정도 아주 언짢은 시간을 보냈다. 오랫동안 생각을 정리하다가, 결국 아빠에게 SOS를 청해서 생각을 정리한 내용을 전달했다. 우리 사이는 당연하지 않은 사이야, 아빠. 아빠는 바로 수긍했다. 요즘 네가 괜찮아 보이길래, 상처가 다 나았다고 생각했지 뭐니. 


동생은 전화로 내게 "엄마랑 싸우지 좀 마. 용돈 그거 좀 주면 되잖아. 돈이 없는 거면 그냥 용돈 드리겠다고 한 다음에 나한테 말해. 그 돈 내가 보내 드릴게.", "너도 진짜 지겹다. 엄마가 짜증 내는 거야 그렇다 쳐도 너는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야?"와 같은 말을 마구 던졌다.


 가해자들은 어쩌면 그렇게 편리하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상처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나을 수 있는 건가? 상처가 있는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상처를 준 사람과 상처를 받은 사람이 어떤 문제에서 똑같은 양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


 한 지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쭉 하고 있으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체 왜 진선쌤에게만 그러시는 거예요? 동석해 있던 다른 분이 종교가 관련되어 있어서 그럴 확률이 크지요.라고 이야기하자 다들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질문한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귀순하고 투항하라?"하고 요약했다. 나는 그 말에 근래 들어서 가장 크게 웃었다. 맞다.


 결혼을 둘러싸고도 우린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다. 내가 종교생활을 그만두겠다고 했던 2011년 이후로 갈등을 빚은 많은 카테고리 가운데 비중이 큰 것 하나가 결혼과 돈이기도 했다. 너, 같은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게 될 게 뻔할 텐데, 그러면 난 너에게 한 푼도 줄 수 없어.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엄마가 돈의 액수(누군가에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ㅎㅎ)를 정확히 명시하면서 나를 은근히 협박하던 모든 말들에 대해서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같은 금액의 돈을 동생에게는 주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생은 동생이고 나는 나이니 신경 쓰지 말자고도 몇 번씩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아빠가 개입하여 이 문제에서는 양쪽 다 공평히 받는 것으로 해결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차별의 근본을 알 수가 없다. 남녀 차별? 나이 차별? 종교로 인한 차별?(나는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배신자, 동생은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뭣도 아닌 상태이기는 하다) 혹은 말을 잘 듣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에 대한 차별? 


 내가 받은 대우와 관계없이 이성적으로 상대를 사랑하고 대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내가 받은 것과 관계없이, 사랑을 마음에 품자고. 하지만 사랑을 품겠다는 말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걷겠다는 구원 콤플렉스에 빠지겠다는 말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던 시절의 나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었다. 진정 나를 사랑하고 아끼게 된 지금의 나는 내 이웃을 돌보고 싶고, 비인간 존재의 아픔에 공감하고 싶고, 지구의 기후위기를 걱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하지만, 엄마에 대한 사랑은 이제 어쩔 수 없이 휘둘리는 감정적인 무언가가 아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의 일부로서의 사랑이다. 돌봄의 대상으로서의 사랑이고, 나를 공격할 경우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랑이다. 설 이후 내 전화를 계속 거절하고 있는 엄마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이성적이고 다정한 사랑을 전할 수 있을지 오늘도 나는 고민할 것이다. 그 우선순위에는 물론 내가 앞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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