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긴긴밤』을 읽고
잘 만들어진 이야기는 듣는 사람 각자의 삶을 불러오기 한다. 한 살 더 먹게 된 지난주 토요일 오후, 선물 받은 동화책을 읽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는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며 내린 결론이다. 그렇게 불러오기 된 내 이야기가 뾰족뾰족 여기저기 건드려서 아파서 운 걸까, 아니면 치유되는 과정인 걸까. 동화 『긴긴밤』을 읽으면서 다들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까?
* 동화의 미리니름이 있으므로 주의 부탁드린다.
내가 상호상담 공동체를 하며 느끼게 된 것 중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부적절한 모습을 하고 있다'라고 느끼는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세상은 무언가 정해진 모습, 남들 같은 모습이 될 것을 요구한다. 노든에게는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코끼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노든의 코와 귀는 자라지 않았다. 대신 뿔이 있을 뿐이었다. 노든은 어렴풋이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노든은 자신이 코뿔소의 모습을 가진 코끼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코끼리가 아님을 알아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된다. 그럼 나는 코뿔소의 모습을 가진 코끼리인가 보지. 내게도 그런 과정이 여러 차례 있었다. 나는 내향인이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외향인들에게 맞춰진 사회에 적응해서 더 편하게 전도를 하러 다닐 수 있을 거야. 나는 지금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자라게 될 거야. 우리 엄마는 나를 늘 성경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양이라고 불렀다. 나는 내가 염소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삶은 너무 고달프다. 모든 감각이 무언가 내게 너는 부족하고, 너는 다르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늘 내게 선택을 강요한다. 세상은 내게 너는 이단이라고 공격하면서 '일반적인'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집과 공동체에서는 내가 너무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열심히 실천할 것을 강요한다. 나는 그 어느 틈에도 속하지 못한 채 '코뿔소'도 '코끼리'도 아닌 존재가 되어 결국은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노든은 호기심을 위해, 코끼리 고아원을 나서지만, 나는 살기 위해 내 세계를 깨고 나갔다.
그는 코끼리답게, 지혜롭고 현명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더 멀리 보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되뇌었다. 마음을 다잡은 노든은 할머니 코끼리에게 고아원에 남겠다고 말했다. 할머니 코끼리가 기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대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초반 15페이지 남짓에서 나는 이미 눈물바다가 되어있었다. 내가 종교 밖의 세상으로 나서겠다고 했을 때 단 한 명의 어른이라도 내게 저렇게 말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나의 부모가 네가 떠나는 것이 슬프지만 나는 괜찮다고 이야기해 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의 엄마는 나의 떠남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상태메시지는 카카오톡 앱이 생긴 이래 '기다릴게'에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내게 직접 나서서 네 답을 찾고 오라고 말하며 응원해 주는 말이 너무 듣고 싶었던 거구나. 당신들은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는 걸 듣고 싶었던 거로구나. 왜냐하면 나도 그때는 어리고 약해서, 상대방의 고통까지 짊어질 힘이 없었으니까.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이 경험했을 일이 아닐까. 부모들은 그렇게 '쿨'하게 아이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자신을 떠나는 것에 서운해하고, 다 커버렸다는 사실에 서운하고...... 그러다 보면 자신들도 부모가 처음이라는 이유로 상처가 될 말들을 꺼내놓기도 하는 것이다.
코끼리 고아원에 남고 싶은 마음과 바깥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코끼리답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그가 코끼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와닿았다. 코끼리로 태어났으면 모든 게 쉬웠을 것이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코끼리들이 긴 코를 천천히 흔들며 노든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 그래."
그리고 노든은 말한다. 코끼리로 태어났다면 모든 게 쉬웠을 것이라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백치로 태어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났을까? 왜 내 그리 똑똑하지도 않은 머리통은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나를 괴롭힐까?
나와는 달리 노든에게는 훌륭한 어른들이 조언을 해준다.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버리는 일을 하지 말라고. 사실 무언가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고. 코끼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코뿔소가 될 수도 있잖아. 이 글을 내가 십 년 전쯤 읽었다면 나는 아마 아주 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아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나와 절연을 하겠다고 하던 부모와 어쨌든 인연을 끊지 않고 공존해 나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코뿔소로서 엄마와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 비종교인의 길을 택했지만, 코끼리처럼 가족을 지키는 길도 어떻게든 지켜내고 있는 중이니까. 아주 아슬아슬한 길이지만.
나는 언젠가 노든에게 그때 고아원을 나오기로 한 선택을 후회한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노든의 입을 빌려 나오는 말들이 마치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인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혹시 부모와 절연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를 편안하고, 사람답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한다고 해서 한 개체가 바로 자신을 찾을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혼자서는 코뿔소가 될 수 없었다. 노든이 코끼리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코뿔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코뿔소들이 있어야만 했다. 다른 코뿔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노든을 코뿔소답게 만들었다.
나도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지금 나의 '코뿔소(준거집단)'는 평화활동가들이다.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 틈 어디엔가 내 자리가 있다고 상상만 해도 즐거워지게 만드는 사람들. 나의 코뿔소들 덕분에 나는 지금도 최선을 다해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코뿔소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찾은 노든은 가족도 만들지만 이내 그 가족을 사냥꾼들 때문에 잃게 된다. 그리고 흘러 흘러 동물원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사귄 친구 앙가부를 잃고 마지막 남은 흰 바위코뿔소가 된다. 그리고 전쟁이 터지며 엉망이 된 동물원에서 버려진 알을 품고 있던 두 수컷 펭귄 커플 치쿠와 윔보 중 살아남은 치쿠를 만나게 된다. (이 짧은 동화 안에 동물의 멸종과, 퀴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골고루 녹여낸 것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이 글은 나의 인생 불러오기기 때문에 생략.)
어느 순간부터인가 치쿠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다. 노든은 알에 대해 딱히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어쩐지 기분 좋았다. (중략)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 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노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되어서. 그런 노든에게 치쿠가 '우리'라는 말을 쓸 때 어쩐지 기분 좋아한다. 세상에 외롭고 싶어 하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도 있어. 이제 나는 뿔이 간질간질할 때 그 기분을 나눌 코뿔소가 없어. 너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바다를 찾을 수 있을지, 다른 펭귄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겠지만 나는 그런 기대 없이 매일 아침 눈을 떠."
내가 탈종교문제로 한창 고민이 많을 때, 종교인이 아니었던 사촌오빠와 이런저런 미래의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사촌오빠가 가장 큰 걱정은 내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려 할 때, 부모님의 종교문제와 나의 경험이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겠다는 점이었다. '너 참 외롭겠다. 너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렵겠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도 나는 동생과 그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겪었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세상 어딘가엔 있겠지만 지금 당장 우린 우리 서로 밖에 없어. 그나마도 지금 서로 세웠던 날이 많이 누그러져서 함께 종교로 인해 겪었던 일들을 나눌 수 있게 된 거지, 이전에는 각자 자신의 고통이 너무 아파서 우린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매일 아침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눈을 뜬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사춘기 때나 잠깐 느껴야 할 그런 감정을 어른이 되어서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너무 바보 같았다.
"나는 코뿔소지 펭귄이 아니라고."
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 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그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데도 함께 할 서로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인지 '나'는 몰랐다는 부분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처음부터 가져본 사람은 그게 없었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걸쳐 찾아도 찾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노든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는 '나'에게 그런 것 없이도 알아볼 수 있다며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그게 바로 우리다.
어쨌든 서로 다른 존재들을 사랑하고, 함께 걷고, 귀 기울여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존재들. 나를 그렇게 발견해 준 사람들 덕분에 나는 살아남았다. 『긴긴밤』의 '나'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봄을 받으며 살아남았다. 지금도 내가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조심스레 안부를 물어주는 나의 수많은 친구들 덕분에 악몽 같은 긴긴밤을 지나 이렇게 상처투성이라도 살아남아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바위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었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간만에 눈물 펑펑 쏟을 수 있는 동화를 읽게 해 준 좋은 친구에게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