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힘들다 힘들어.”
쉬는 시간, 연구실에서 끙끙거리는 옆반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 뭐 하세요?”
“마니또 편지 못 받은 애 주려고 편지 써요. 안 들키게 써야 하는데 힘드네.”
“왼손으로 써보세요! 그럼 감쪽같아요.”
“아! 꿀팁 고마워요!”
삐뚤빼뚤 왼손으로 편지를 쓰시는 옆반선생님이 (나이와는 별개로)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몇 년 전 왼손으로 위장 편지를 써주었던 예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선생님, 저만 마니또 편지를 못 받았어요.”
울먹이는 지영이 앞에서 괜히 미안해졌다. 사실 지영이의 마니또는 시후였다. 특수반 친구인 시후까지 마니또에 끼워준 것이 후회로 밀려오려는 그 순간, 위장 편지를 써줘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번쩍 떠올랐다.
최선을 다해 학생 흉내를 내보았지만 다 써놓고 보니 금세 들킬만한 필체였다. 결국 어른이 쓴 글도, 학생이 쓴 글도 아닌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맛’의 편지가 되어버렸다. 한숨을 내 쉬고는 이번엔 아예 망쳐버려도 좋다는 마음으로 왼손으로 연필을 바꿔 쥐었다. 어머나! 차라리 더 맘에 들어버렸다.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혼자서 왼손잡이 놀이를 하며 뿌듯함을 느꼈다.
다음날 아침, 교실은 난리가 났다.
“야! 드디어 나도 편지 받았다!”
편지를 받은 지영이는 자랑스러운 듯이 편지를 하늘 높이 흔들었다.
“어디? 어디?”
“나도 보여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야, 글자를 보니 남자애가 틀림없어!”
“니가 어떻게 알아?”
“우리 반에 이렇게 글자 못 쓰는 애들은 남자애들밖에 없어!”
학생들의 합리적 의심 앞에서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 분명 못 쓰는 글자를 추구(?)하긴 했는데, 막상 못 썼다고 하니까 기분이 (드럽게) 나빴다.
“야! 이거 누군지 찾아보자!”
오지랖 넓은 민영이가 갑자기 탐정 놀이를 시작했다.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결말이 내심 궁금해졌다. 업무를 보는 척하면서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지만 시선은 아이들 쪽으로 향했다.
민영이는 아이들의 알림장을 요구하면서 필체 분석에 들어갔다. 필체 분석이 재미있었는지 남학생들은 민영이에게 순순히 알림장을 내어줬다. 민영이는 마치 과학수사대처럼 꼼꼼하게 필체를 비교했다. 아침부터 진지한 그 모습에 흰 장갑과 돋보기를 제공해야만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야! 재혁이! 이거 니가 썼지?”
마침내, 재혁이가 당첨되었다.(재혁아 미안하다.)
“아니야, 내가 쓴 거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아니라니까! 내 마니또는 따로 있다니까!”
“얘들아, 너희들이 한 번 봐봐.”
“어디? 어디?”
난리가 났다. 재혁이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출동했다.
“얘들아, 자리에 앉자!”
아이들이 아쉬운 듯이 자리에 앉았다. 바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마니또는 누구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거라고 했죠?”
아이들은 금세 소금물에 절여진 김장 배추들처럼 풀이 죽었다. 나는 마치 김장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완성형 주부 9단인 것처럼 고춧가루까지 팍팍 뿌렸다.
“지영아 마니또한테 편지 받은 거 축하해. 우리 그 이상은 밝혀내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선생님이 보니까 이거 재혁이 글씨 아니네!”
재혁이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2주 뒤 마니또 발표 날이 돌아왔다.
“지영이 마니또는 시후! 시후는 지영이한테 편지도 써주고 활동을 참 잘했어요!”
아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민영이는 시후까지 의심해보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말없이 해맑은 시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씩 웃었다.
시후를 바라보며 나도 그냥 씩 웃었다.
왼손으로 쓴 편지는 우리만의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