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얼마 만의 입학식인가!’
입학식 사회를 보는 교무부장도, 입학식을 총괄 운영하는 1학년 부장교사도 아니면서 아침부터 쓸데없이 비장해졌다.
출근 준비는 평소보다 조금 서둘렀다. 어젯밤에 미리 챙겨 둔 옷을 입고 헤어 드라이기를 집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컬링 기능을 신나게 사용했다. 머리가 꼬불꼬불해지면서 헤어스타일이 점점 풍성해졌다. 마치 오은영 박사님의 풍성한 헤어스타일을 흉내 낸 가발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너무 옛날 스타일인가?’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얼굴이 작아 보이는 효과가 난 듯하여 나름 만족했다. 화장도 신경 쓰다 보니 제법 두꺼운 화장이 되었다.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외모 체크를 마친 후 거울 속 나에게 한마디 해줬다.
‘오늘 잘 할 수 있어! 즐겁게! 파이팅!’
예쁜 옷과 예쁜 화장 그리고 신나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연구실에 도착하니 동학년 선생님 모두 예쁜 옷과 예쁜 화장으로 등장했다. 우리는 서로의 미모를 칭찬하면서 입학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화려한 풍선들로 장식된 체육관으로 이동해서 1학년 신입생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신입생과 학부모님들이 체육관으로 입장했다. 발랄했던 우리들은 점점 웃음기를 잃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이름을 묻고 자리에 앉히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본인의 반을 잘 못 알고 있는 학생, 한국말을 아예 못하는 학생,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의 이름 앞에 여섯 명의 1학년 담임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다행히 결석생 없이 행사는 잘 진행되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사 진행 솜씨를 보여주신 교무부장님, 방송 상태 정비 및 단상 정리 등의 전반적인 상황을 눈치껏 잘 운영해 준 전담 선생님과 실무사님, 반주를 무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1학년 어린이들을 위해 온 힘 다해 지휘해 주신 전담 선생님, 계단 안전과 비상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보건 선생님 등 도와주신 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정말 오랜만에 경험한 환상의 팀워크였다.
2부는 교실로 이동해서 운영했다. 담임교사 소개, 학교생활 안내, 제출 서류 및 앱 설치 안내 등 많은 정보가 있는 PPT를 준비해서 하나하나 설명했다.
내가 준비한 오늘의 포인트는 ‘아침에 꼭 똥 싸고 오기’였다. 몇 번의 1학년 담임 경험으로 아이들이 ‘똥’ 이야기는 백 번 들어도 또 듣고 싶어 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고 화장실 꼭 들렸다가 등교하세요.’보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냠냠 먹고 그다음에 똥을 꼭 싸고 와야 해요.’라고 말해주면 아이들은 더 좋아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실행에 옮겼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냠냠 먹고 그다음에 똥을 꼭 싸고 와야 해요.”
‘네!’라는 얌전한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의외의 대답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 저는 변비에요.”
“선생님, 저는 밤에도 똥을 잘 싸요.”
“선생님, 저는 혼자서도 똥을 잘 닦아요.”
갑자기 똥 파티가 벌어졌다. 아 맞다! 잊고 있었던 1학년의 맛이 떠올랐다.
이거다! 이거였어! 담임교사가 틈을 주는 순간, 순식간에 대혼란의 장이 되어버리는 이것이 바로 1학년의 맛이다! 갑자기 다시는 1학년 안 한다고 다짐했었던 몇 년 전 나의 다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마치 산고의 고통을 까맣게 잊고 다시 만삭의 배가 되어 산부인과로 향하다가 현실 자각 타임을 마주하는 산모의 마음 같았다.
그런데 어쩌나. 도망갈 수가 없다. 지금 스물네 명의 아이들과 그 보호자들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마음속 절망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헛기침을 하며 마스크 때문에 불편한 척 시간을 좀 끌었다.
겨우 마음을 다독이며 안내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용감한 어린이가 손을 들었다. ‘설마 여러 사람 앞에서 이상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라는 얄팍한 믿음으로 질문을 들어주었다.
“선생님, 그런데 필통이 너무 작아서 연필이 안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요? 우리 엄마가 필통을 안 사준대요."
아! 이를 어쩌나! 정신이 혼미해질 뻔했다. 그래도 거의 다 왔으니 마지막 남은 멘탈을 끌어모았다.
“아! 진짜 고민되었겠어요! 우리 친구 인생 최대의 위기군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갑자기 하브루타 질문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의 질문에 아이들은 졸린 소처럼 눈을 껌뻑껌뻑 하더니 이내 너나없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필통을 사주라고 해요.”
“연필을 조금 부러 뜨려 보는 것은 어떨까요?”
“필통을 학교에 놓고 다니면 조금 삐져나와도 괜찮아요.”
“필통에 맞을 때까지 연필을 계속 깎아요.”
질문한 학생에게 어떤 답이 맘에 드냐고 물었다. 학생은 오늘 집에 가서 필통에 맞을 때까지 연필을 계속 깎아보겠다고 했다.
뒤에 있는 어른들은 귀엽다는 듯이 깔깔깔 웃으셨다. 어른들의 웃음에 교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여유를 찾은 나는 그 학생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오늘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엄마가 필통을 꼭 사줄 거예요. 선생님 말을 꼭 믿어보세요. 그럼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답니다.”
그 학생은 어리둥절했고, 그 학생의 어머니는 빨개진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겨우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을 돌려보냈다. 점심을 먹고 체육관을 정리했다. 그다음 새롭게 취임하신 교장 선생님의 취임식에 참여했고, 교실로 다시 돌아와 서류를 정리했다. 정말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하루 일정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의 차를 탔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푸념을 늘어놓았다.
“여보, 나 오늘 완전 털렸어."
“응. 털렸지? 나도 오늘 완전 털렸어."
목적어가 없다. 그래도 대화가 잘 통한다. 왜냐하면 남편은 1학년 부장이기 때문이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그의 하루는 나의 하루였고, 나의 하루는 그의 하루였을 것이다.
겨우 퇴근하고 문 앞에 서서 오늘 도착한 택배를 확인했다. 멀리 부산에 사시는 곽도경 선생님으로부터 택배가 왔다. ‘초등학교 1학년 학교생활 궁금하시죠?’의 작가이신 선생님께서 책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책을 보내주신 분에 대한 감사함과 입학식의 피로감이 얽힌 오묘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표지를 넘기니 작가님의 사인이 눈에 띄었다.
‘도전하고 도와주는 즐거운 일상 기대합니다.’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곽도경 선생님께서 ‘유 선생님! 올 한 해 힘들겠지만 그래도 도전하고 도와주세요. 할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씀해 주시는 듯했다. 1학년 담임교사를 희망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단 하루 만에 교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먹은 나약한 스스로에 대한 실망 같은 무거운 감정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도전하고 도와주는 삶을 살자! 한 번 살아보자!'
몸은 지쳤지만 마음속에는 새로운 다짐이 생겼다.
이제 2023년 매일은 나에게 도전하는 하루가 될 것이다. 입학식 날 이렇게 따뜻한 선물을 받았으니 내가 그 선물에 보답하는 일은 그 선물이 말해 준 대로 사는 방법뿐이다.
이제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나는 올해 1학년 선생님으로 사는 삶에 도전한다! 또, 1학년 학생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즐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