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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급식



1학년 담임교사 2일 차.


오늘도 쉽지 않았다. 후.


자기소개하고 학교 규칙 설명하는데 도대체 진짜 공부는 언제 시작하냐고 묻는다. (약 12회 대답해 줌.)


지금이 쉬는 시간인지 수업 시간인지 계속 묻는다. (약 17번 대답해 줌.)


필통과 사인펜을 사물함에 넣어도 되는지 자꾸 묻는다. (약 11번 대답해 줌.)


밥은 언제 먹는지 열 명의 학생들이 시간 차를 두고 각각 두 번씩 묻는다. (약 20번 대답해 줌)


“선생님, 배가 고파요.”

“네. 선생님도 배가 고파요.”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나왔다. 이 혼란의 도가니를 벗어나 어디론가 도망쳐서 고요한 ‘혼밥’을 하고 싶어졌다. 슬픔도 잠시, 40분 후에는 이 아이들과 식사를 해야 한다는 공포가 몰려왔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미리 준비한 급식지도 PPT 파일을 열었다. (1학년 담임교사에게 슬픔은 사치라는 것을 비로소 오늘 깨달음.)


급식 예절과 영양교육을 잘 마친 뒤,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30초 손 씻기가 어려우면 속으로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빨리 부르면서 손을 씻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더니 화장실에서 생일 축하 노래가 돌림노래처럼 들려왔다. 분명 속으로 부르라고 했는데! 후. 치명적으로 피곤한데 치명적으로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감사하게도 전담 선생님과 조리사님들께서 배식 지원을 들어와 1학년의 첫 급식을 도와주신다고 했다. 우리 반에는 조리사님이 들어오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영양 선생님께서 오셨다. 큰 키에 날씬한 영양 선생님은 흰 가운을 입고 등장하셨다. 급식차를 밀고 우리 교실로 들어오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전문성과 후광이 느껴졌다. 생각지 못한 아름다운 분의 등장으로 우리 반 학생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들아, 우리 반은 특별히 영양 선생님이 오셨어. 인사드리자.”

“안녕하세요!”

영양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배식은 정말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얘들아, 골고루 먹어요. 그러면 선생님처럼 키가 쑥 클 거예요."

라는 영양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 큰 영양 선생님의 말씀은 묘한 설득력이 있었는지 갑자기 아이들은 밥과 국을 더 받기 시작했다.

“야, 미역국에 밥 말아 먹으면 진짜 맛있어!”

“맞아, 맞아.”

아이들은 밥 말은 미역국을 후루룩후루룩 삼켰다. 사실 진짜 잘 먹는 아이는 5-6명 정도 되고, 나머지 아이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홀린 듯이 입으로 밥을 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와, 3반 친구들은 김치를 잘 먹는구나. 선생님은 이렇게 잘 먹는 1학년을 본 적이 없어! 너희들 정말 대단하다!”

영양 선생님께서 김치를 더 받는 아이들을 칭찬하셨더니 아이들은 갑자기 또 서로 김치를 먹겠다고 난리가 났다.

“야, 한국인은 김치지!”

“야, 한국인은 배추김치야!”

“야, 나는 김치 하나도 안 매워.”

“야, 나는 이거 백 개도 먹을 수 있어.”

“야, 나는 김치 귀신이거든?”


후. 김치 귀신까지 나왔다. 결국, 신이 난 급식 귀신들 덕분에 밥과 미역국에 이어 김치까지 동이 났다. 영양 선생님과 나는 ‘오늘 준비한 100그릇을 다 팔고 난 음식점 사장과 종업원의 아이 컨텍’과 같은 뿌듯한 교감을 나누었다. 그런데 긴급상황이 발생했다. (1학년 담임교사는 뿌듯함을 느낄 겨를이 없음.)


“선생님! 수빈이 울어요.”

이틀 동안 우는 학생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1호 친구가 나타났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얼른 수빈이 옆으로 갔다.


“수빈아 왜 울어?”

자그마한 수빈이는 거의 손대지 않은 급식 판을 앞에 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다리 저림을 참고 또 참으며 한참을 수빈이 옆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안정을 찾은 수빈이에게 운 이유를 다시 물어봤다.

“무. 서. 워. 요.”

“왜 무서워?”

“그. 냥.”


아쉽게도 수빈이는 그 이상의 정보는 주지 않았다. 거의 먹지 않은 음식과 작은 목소리로 고백한 '무섭다'는 감정을 힌트로 나는 탐정놀이를 시작했다.


‘혹시 급식 먹기 싫은 감정을 그냥 무섭다고 표현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니었다. 수빈이는 수업 시간에 감정 표현이 풍부하고, 이해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터무니없이 ‘무섭다’라고 표현할 학생은 아니었다. 한참 고민 끝에 답을 찾았다.


수빈이는 친구들이 너무 잘 먹는 이 분위기가 무서웠다. 전투적으로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을 다 소화해버리는 이 친구들이 정말 무서웠던 것이다. 다들 잘 먹는데 나만 못 먹는 것 같은 이 소외감이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순간 ‘픽’하고 웃음이 나왔다. 내가 봐도 허세 가득한 급식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그저 귀여운 허세였는데, 또래들에게는 위기와 공포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빈아, 다 먹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천천히 먹어도 된단다. 우리 오늘은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자, 알았지?”

수빈이는 무겁게 밥알을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급식을 먹고 급식판을 정리했다. 무서웠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식사를 마친 수빈이가 예쁘고 기특했다. 가방을 메고 집에 가는 수빈이를 불렀다.


“수빈아 오늘 친구들이 밥을 너무 잘 먹어서 많이 놀랐지?”

“네.”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양도 다르고, 먹는 속도도 다르단다.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오늘 끝까지 노력해 줘서 고마워.”

“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다행히 수빈이는 웃으며 인사하며 돌아섰다. 넓적하고 반짝거리는 핑크 가방과 그 속에 숨어있는 듯한 작은 수빈이의 뒷모습이 내 마음을 살짝 긁었다.


간질거리면서도 찌릿한데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금방 사랑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올 한 해 우리 수빈이의 몸과 마음이 핑크 가방을 이기고도 남을 정도로 쑥쑥 자라났으면 좋겠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온통 털린 일(?) 뿐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록하니 그래도 많이 털린 것은 아니라는 위안과 안도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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